(서울=연합인포맥스) 정지서 기자 =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과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가 동시에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한국 경제의 새로운 화두로 던지면서 그 배경에 시장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부의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경제 사령탑과 통화정책을 책임지는 시장의 빅브라더가 같은 시점에 같은 숫자를 꺼내든 것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시장에서는 이를 두고 AI와 반도체가 이끄는 새로운 성장 국면에 대해 청와대와 한국은행이 동시에 문제의식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 반도체가 만든 '명목 성장', 교역조건을 바꿨다
신 총재는 지난 19일 한국금융학회 특별심포지엄 기조연설에서 "앞으로는 실질 GDP뿐 아니라 명목 GDP도 계속 봐야 한다"며 명목 GDP를 한국 경제를 읽는 새로운 지표로 내세웠다.
이튿날 김 실장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명목 10% 후반 경제의 환희, 낯섦,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며 올해 1분기 명목 성장률 17.1%의 의미를 분석했다.
그동안 경제정책의 중심에는 실질 GDP가 있었다. 물가 변동을 제거한 실질 성장률이 경제의 체력을 보여주는 핵심 지표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김 실장과 신 총재는 이번 '명목 성장'의 성격을 인플레이션이 아닌 산업의 호황이 준 결과물로 진단했다.
김 실장은 "1980~90년대의 명목 성장이 국내 물가 상승의 성격이 강했다면 지금의 명목 성장은 해외에서 벌어들인 소득과 기업 수익성 개선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평가했다.
신 총재 역시 최근 명목 성장률 급등에 대해 "1970년대로 가면 비슷한 숫자가 있었지만 그때는 인플레이션이 굉장히 높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며 "높은 명목 성장률은 국내 인플레이션 때문이 아니라 수출물가가 급속도로 올랐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과거 한국 경제의 높은 명목 성장이 물가 상승의 그림자를 동반했다면, 지금의 명목 성장률 급등은 AI 투자 확대와 반도체 가격 상승이 만들어낸 소득 증가의 결과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올해 1분기 명목 GDP 성장률은 17.1%를 기록했지만 소비자물가 상승률(CPI)은 3% 안팎에 머물고 있다.
경제 전체의 명목 규모는 급격히 커지고 있지만, 그 배경은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수출 경쟁력 강화와 교역조건 개선에 있다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된 인식이다.
신 총재가 특히 강조한 지표는 실질 GDP와 실질 국내총소득(GDI)의 격차다.
올해 1분기 실질 GDP 증가율은 3.8%였지만 실질 GDI는 13.2% 증가했다. 실질 GDP가 실제 생산량의 증가를 의미한다면, 실질 GDI는 그 생산물을 팔아 얼마나 더 많은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신 총재는 이를 교역조건 개선 효과로 설명했다. 한국이 수출하는 반도체 가격이 수입하는 상품 가격보다 훨씬 빠르게 오르면서 국가 전체의 구매력이 급증하고 있다는 의미다.
김 실장 역시 같은 현상을 다른 표현으로 설명했다. 그는 "똑같이 일했는데 살 수 있는 것이 압도적으로 늘어났다"고 적었다.
반도체 가격 상승이 단순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 개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소득과 구매력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 한은은 '성장 지속성'·청와대는 '성장 분배' 고민
김 실장과 신 총재의 문제의식은 성장에 대한 체감에서도 드러난다.
신 총재는 이번 명목 성장의 혜택이 경제 전반으로 얼마나 확산될 수 있는지를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그는 "한국은 양극화가 심한 상황"이라며 "이런 총량의 혜택이 구조적으로 얼마나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온기가 경제에 얼마나 퍼질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 실장은 보다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그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은 폭증하는데 동네 상가는 공실을 걱정한다"고 적었다.
거시지표는 뜨겁지만 자영업자의 체감경기는 여전히 차갑고, 주가는 사상 최고치를 향하지만 폐업을 고민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얘기다.
명목 성장률 17.1%라는 숫자가 한국 경제 전체를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도체와 AI가 만들어낸 성장의 과실이 경제 전반으로 확산되지 못할 경우 높은 성장률과 낮은 체감경기가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이 지속될 수 있다는 우려다.
이에 신 총재는 "이 현상이 잠시 지나가는 일인지, 아니면 지속적으로 나타날 현상인지 물어볼 수 있다"며 성장의 지속 가능성에 주목했다.
AI가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장기화할 경우 한국 경제가 오랫동안 전제로 삼아온 저성장·저금리 공식 자체가 바뀔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반면 김 실장의 관심은 성장 이후에 있다.
그는 이번 호황이 한국 경제가 저성장의 터널을 벗어날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성장의 과실이 특정 자산과 계층에 집중될 가능성을 경계했다.
특히 "반도체가 벌어온 국부가 부동산 불로소득으로 흡수되고 성장의 과실이 소수에게만 집중된다면 이번 호황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신 총재가 던진 질문이 '이번 성장은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라면, 김 실장의 질문은 "이번 성장의 혜택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에 가깝다.
시장에선 김 실장과 신 총재의 문제의식이 결국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AI와 반도체가 만들어낸 명목 성장률 17.1%가 일시적인 숫자에 그칠지, 아니면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 체제로 이어질지는 성장의 지속성과 함께 그 과실이 경제 전반으로 얼마나 확산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한 시장 관계자는 "성장의 지속성과 분배는 같은 시간의 흐름 선상에 움직이는 문제일 뿐 같은 고민에서 출발한다"며 "청와대와 한은이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시장에 주는 방향성이자 시그널"이라고 평가했다.
jsjeong@yna.co.kr
정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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