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과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는 서로를 잘 안다. 관료 사회와 국제금융가에서 오래 활동한 사람들은 두 사람을 각자의 분야에서 가장 시장 친화적인 정책가와 경제학자로 기억한다.
둘은 같은 조직에서 일한 적은 없다. 그러나 같은 시대를 통과했다. 국제회의장에서 마주 앉았고 금융위기와 팬데믹, 공급망 재편과 AI 혁명을 지켜봤다. 무엇보다 둘 다 시장을 숫자가 아니라 구조로 읽는 사람들이다.
그런 두 사람이 최근 같은 숫자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7.1%, 올해 1분기 한국의 명목 GDP 성장률이다.
명목 GDP는 오랫동안 경제정책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 경제학자들은 실질 GDP를 봤고 정책당국 역시 물가를 제거한 성장률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명목 GDP는 인플레이션에 의해 왜곡될 수 있는 숫자로 취급됐다.
그런데 최근 한국 경제를 움직이는 두 사람이 동시에 명목 GDP를 화두로 꺼내 들었다. 신 총재는 실질 GDP와 명목 GDP를 계속 함께 봐야 한다며 정책의 중심으로 명목 GDP를 끌어들였고, 다음 날 김 실장도 올해 1분기 17.1%를 기록한 명목 GDP 성장률이 갖는 의미를 공들여 분석했다.
시장에서는 이를 우연으로 보지 않는다. 두 사람이 주목한 것은 성장률이 아니라 성장의 성격이기 때문이다.
17.1%라는 숫자는 낯설다. 한국 경제가 마지막으로 두 자릿수 명목 성장률을 기록한 것은 2002년이다. 한일 월드컵이 열렸고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르던 시절이다. 그 이후 한국 경제는 저성장에 적응해 왔다. 기업도 정부도 가계도 한 자릿수 명목 성장에 맞춰 살아왔다.
그런데 이번 성장의 원인은 과거와 다르다. 물가가 아니라 AI와 반도체다.
신 총재는 최근 성장의 배경을 교역조건 개선에서 찾았다. 한국이 수출하는 반도체 가격은 급등했는데 수입물가는 그만큼 오르지 않았다. 같은 양을 생산해도 더 많은 소득을 벌 수 있게 된 것이다.
김 실장 역시 비슷한 진단을 내렸다. 과거의 명목 성장이 물가 상승의 결과였다면 지금의 명목 성장은 해외에서 벌어들인 소득과 기업 수익성 개선의 결과라는 것이다.
둘은 같은 현상을 보고 있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숫자가 실질 GDP와 실질 GDI의 괴리다. 올해 1분기 실질 GDP는 3.8% 증가했지만 실질 GDI는 13.2% 늘었다. GDP가 얼마나 생산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라면 GDI는 생산물을 팔아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살 수 있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그만큼 한국 경제는 더 많이 만든 것보다 더 많이 벌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두 사람의 고민은 갈라진다.
신 총재가 바라보는 숫자는 국내총소득(GDI) 이다. 그의 관심은 성장의 지속성에 있다. 교역조건 개선이 일시적인 반도체 사이클인지, 아니면 AI가 만들어낸 구조적 변화인지가 중요하다. 만약 후자라면 한국 경제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저성장·저금리의 공식 자체가 바뀔 수 있다. 잠재성장률도, 중립금리도 다시 계산해야 한다.
반면 김 실장이 바라보는 숫자는 국민총소득(GNI)에 가깝다. 그의 관심은 성장이 어디로 흐를지에 있다. 반도체 기업들이 벌어들인 이익은 어디로 갈 것인가, AI가 만든 초과이윤은 누구의 몫이 될 것인가, 늘어난 법인세와 초과세수는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핵심이다. 최근 등장한 국민배당금 논의와 초과세수 활용 방안, 세수추계 개혁, 보유세와 양도세 개편 논의는 서로 다른 정책처럼 보이지만 출발점은 같다. AI와 반도체가 만들어낸 새로운 소득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결국 신 총재가 주목한 것은 생산보다 빠르게 늘어나는 구매력에 있다. GDI의 세계다. 김 실장이 주목한 것은 그렇게 늘어난 소득의 귀착점이었다. GNI의 세계에 가깝다.
한 사람은 한국 경제가 얼마나 더 부유해질 수 있는지를 묻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그렇게 늘어난 부가 누구에게 돌아갈지를 묻고 있다.
결국 두 사람은 같은 숫자를 보고 있다. 다만 그 안에서 신 총재는 성장의 생성 과정을, 김 실장은 성장의 분배 과정을 더 고민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 경제의 질문은 늘 같았다.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 그런데 17.1%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성장이 시작됐다면 그것을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과실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그래서 17.1%는 단순한 성장률이 아니다. 한국 경제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질문을 다시 꺼내게 만든 숫자다. (경제부 정치팀 차장)
jsjeong@yna.co.kr
정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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