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과거 제조업의 공장 입지 선정은 비교적 명쾌했다. 원자재를 들여올 항만이 가까운지, 저렴한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지, 물류비와 인건비를 얼마나 낮출 수 있는지를 따지면 답이 나왔다. 시장 논리와 경제적 효율성이 부지 선정을 좌우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지도는 전혀 다른 원리로 그려지고 있다. 물이 귀한 미국 애리조나의 사막 한가운데에 세계 최고 파운드리 기업의 첨단 팹(Fab)이 들어서고, 반도체 인프라가 황무지에 가깝던 일본 구마모토의 시골 마을과 미국 오하이오주의 낙후된 공업지대에 수십조 원의 돈이 쏟아진다. 이 기묘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는 경제학이 아니다. 바로 '정치'다.
(워싱턴 EPA=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8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정보통신기업 인텔의 최고경영자인 브라이언 크르자니치를 초청한 가운데 발언하고 있다. 인텔은 미국 애리조나 주에 70억 달러(8조220억원)를 투자해 생산공장을 짓기로 했다. shin@yna.co.kr
미국의 반도체법(CHIPS Act)은 시장 논리를 정치가 어떻게 재편하는지 보여주는 가장 노골적인 사례다. 미국 정부가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뿌리며 글로벌 기업들의 공장을 유치한 곳들을 뜯어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발견된다.
인텔이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오하이오, TSMC가 둥지를 튼 애리조나는 미국 대선 때마다 승패를 가르는 대표적인 '스윙 스테이트(경합주)'이자, 이른바 러스트 벨트(낙후된 제조업 지대)의 부흥이라는 정치적 숙제를 안은 곳들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핵심 엔지니어들의 정주 여건이나 기존 서부 지역의 고도화된 생태계를 고려하는 것이 시장 논리에 부합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내 제조'라는 바이든 행정부의 정치적 치적과 표심 관리, 그리고 이에 동조해야만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압박 속에서 기업들은 사막과 낙후 지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도쿄 교도=연합뉴스)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1위 업체인 대만 TSMC의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제1공장 개소식이 24일 열렸다. TSMC의 자회사로 공장 운영을 맡은 JASM의 간판이 공장 앞에 세워져있다. 2024.2.24. evan@yna.co.kr
일본의 구마모토 사례 역시 일본 집권 자민당의 정치적 계산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1980년대 '실리콘 아일랜드'의 영광을 잃고 지방 소멸의 위기에 직면했던 규슈 지역에 TSMC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건설 비용의 절반에 달하는 약 4조원의 혈세를 퍼부었다. 외국 기업에 대한 과도한 특혜라는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소니와 덴소 등 일본의 상징적인 대기업들을 합작 주주로 밀어넣었다. 결국 이 공장은 일본 정부에게 '제조업 부활'과 '지방 살리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쥐여준 최고의 정치적 산물이 됐다.
반도체 종주국을 자처하는 대만에도 부지 선정은 국내 정치를 넘어 '국가 생존'의 문제다. TSMC의 가장 고도화된 첨단 공정은 철저하게 대만 본토 내에만 지어지도록 정부가 통제한다. 이는 전 세계 첨단 칩의 공급줄을 대만이 쥐고 있어야만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중국의 침공 위협으로부터 대만을 지켜줄 것이라는 정치적 판단, 즉 '실리콘 방패(Silicon Shield)' 전략 때문이다.
동시에 대만 내부에서도 TSMC 공장을 어느 도시에 배정하느냐는 총통 선거와 지방 선거의 향방을 가르는 최대의 무기다. 기존 신주과학단지를 벗어나 타이중, 카오슝 등 남부 지역으로 첨단 팹을 분산 배치한 배경에는 지역 균형 발전을 내세워 표심을 분산하고 결집하려는 대만 당국의 고도의 정무적 판단이 깔려 있었다.
[촬영 김철문]
이처럼 글로벌 무대에서 반도체 부지 선정은 안보적 이해관계와 표심, 국가 전략이 결합한 산물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전남·광주 등 지방으로 반도체 투자를 유치하려는 움직임이 일며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정치적 명분과 '투자 효율성'이라는 시장 논리가 다시 맞붙고 있다.
사실 국내 반도체 입지의 지방 이전론이 이번에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니다. 지난 2월, 수도권에 90% 이상 밀집된 K반도체 자원을 지방으로 분산하자는 정치권의 목소리가 나왔을 때만 해도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용인과 평택 등에 대규모 투자 계획을 확정한 상태에서, 이를 물리적으로 뒤집으려는 시도는 부당하다는 여론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묻혀버린 토론을 지금 다시 복기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제 논의의 초점이 '당위'가 아닌 '반대급부'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출처: 연합뉴스 자료사진]
해외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기업들이 기꺼이 사막과 시골로 향했던 결정적 이유는 지역 균형이라는 '정치적 명분'에 동조해서가 아니다. 그 명분을 수용할 때 정부가 기업의 리스크를 완벽히 상쇄해 줄 만한 '압도적인 지원 패키지'를 쥐여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파격적인 세제 혜택, 일본 정부의 속도감 있는 인허가 패스트트랙과 전력·용수 인프라의 100% 책임 보장이라는 확실한 '당근'이 있었기에 기업들도 화답할 수 있었다.
글로벌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기술 격차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부담을 안고 있다. 정치권이 기존 계획을 넘어서는 대규모 지방 투자를 요구하려면, 전력·용수 인프라와 교통망, 인력 정주 여건, 규제 완화, 비용 부담 완화 등 구체적인 지원 방안이 먼저 제시돼야 한다.
반도체 부지 선정에 정치적 판단이 개입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판단은 기업의 투자 부담을 키우는 방식이 아니라, 장기 투자를 가능하게 하는 여건을 만드는 방식이어야 한다. 정치권이 내세우는 논리가 기업을 움직일 만한 실질적 유인을 갖추고 있는지, 아니면 투자 부담을 기업에 전가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지 냉정하게 따져볼 때다. (산업부 부장)
ysyoon@yna.co.kr
윤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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