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1983년 2월 일본 도쿄. 이병철 회장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삼성의 반도체 진출을 선언했다. 당시만 해도 무모한 도전이었다.
일본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고 한국은 기술도, 인력도, 생태계도 변변치 않았다. '삼성이 돈을 쏟아붓다 끝날 것'이라는 냉소가 적지 않았다.
훗날 이 회장은 그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잘못하면 삼성그룹의 절반 이상이 날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까지만 기억한다.
하지만 그 다음 한 문장이 더 있었다. "그래도 그 위험을 감수할 기업은 삼성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한 번의 결단이 삼성을 바꿨고, 대한민국 산업사를 바꿨다. 그리고 43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또 한 번 비슷한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지난 25일 청와대. 이재용 회장이 이재명 대통령과 마주 앉았다. 분위기는 예상보다 훨씬 화기애애했다고 한다. 이날 이 회장은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이후 벌어들인 돈보다 지난 1년간 반도체 사업에서 벌어들인 돈이 더 많다"고 털어놨다. 그 말을 들은 현장의 배석자들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삼성이 왜 이렇게 큰 숫자를 가지고 올 수 있었는지가 단숨에 이해되는 한마디였다.
나흘 뒤 청와대, 이 대통령은 다시 이재용 회장과 한 무대에 올랐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함께였다. 이 대통령은 수 천조원의 투자 계획을 발표한 이 회장과 최 회장을 향해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했다.
'큰 절을 하고 싶다'는 이 대통령을 참모진들이 가까스로 말린 끝에 나온 절충안이었다. 이 대통령은 이 회장과 최 회장의 손을 잡고 "국민 영웅, 국가 영웅으로 불러드리고 싶다"고 말하며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숫자가 내포한 시대의 변화다.
예전에는 좋은 제품을 만드는 기업이 돈을 벌었다. 지금은 좋은 공장을 먼저 짓는 기업이 더 많은 돈을 번다. 돈을 버는 시대에서, 돈을 짓는 시대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반도체를 사이클 산업이라고 배웠다. 호황이 오면 증설하고, 공급이 넘치면 가격이 떨어지고, 불황을 버티면 다시 호황이 오는 산업. 틀린 말은 아니다. 과거의 반도체는 그렇게 움직여 왔다.
이제 AI는 그 공식을 바꾸고 있다. 그 옛날 전기, 인터넷처럼 경제 전체의 생산 방식을 바꾸는 주체로 자리잡았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더 좋은 반도체만이 아니다. 더 많은 반도체다.
병목은 점점 생산설비로 올라가고 있다. 반도체 공장 증설을 대하는 기업의 셈법이 달라진 것도 이 때문이다. 얼핏 과장된 숫자처럼 들리지만 기업의 계산은 단순하다. AI가 만드는 메모리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 시장을 경쟁사에 내줄 수밖에 없다. 공장을 먼저 짓는 것이 가장 수익률 높은 투자다. AI 시대 가장 희소한 자산은 기술이 아니라 생산능력이 된 셈이다.
돌이켜보면, 대한민국은 늘 무언가를 지으며 성장했다. 포항제철을 지었고, 거제의 조선소를 지었고, 경부고속도로를 놓았고, 반도체 공장을 지었다. 그때마다 '너무 큰 투자'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공장들이 대한민국의 수출이 됐고, 국부가 됐으며, 도시가 됐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승부를 가르는 것은 결국 결단이다.
40년 전에는 반도체를 시작하는 용기가 필요했다. 이제는 누구보다 빨리 짓는 결단이 필요하다. 역사는 돌이켜보면 늘 공장이 먼저였고, 성장과 도시와 일자리는 그 뒤를 자연스레 따라왔다.
1983년의 삼성은 반도체를 선택했다. 2026년의 대한민국은 AI 시대의 생산 플랫폼이 되기로 선택했다. 40년 전의 결단이 오늘의 삼성을 만들었다면, 어제의 결단은 대한민국의 다음 40년을 만드리란 확신이다. (경제부 정치팀 차장)
(서울=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기업 투자계획 발표 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인사하고 있다. 왼쪽은 최태원 SK그룹 회장. 2026.6.29 [청와대통신사진기자단] xyz@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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