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 확약 없었다" 이정훈 승소했지만…대주주 상장 관여 규율 법령 필요
상장 걸러낸 건 규제 아닌 은행 계약
디지털자산기본법 발의안에도 책임 물을 '책무구조도'는 빠져
[연합뉴스 사진 제공]
(서울=연합인포맥스) 전병훈 기자 = 가상자산 거래소 빗썸의 창업주 이정훈 전 빗썸홀딩스 의장이 '빗썸코인(BXA)' 상장 추진 과정에 깊숙이 관여한 정황이 법원 판결문에서 확인됐다.
법원은 이 전 의장의 손을 들어줬지만, 거래소 대주주의 상장 관여를 심사하거나 제재할 법적 장치가 없다는 규제 공백은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났다.
◇1·2심 모두 기각…형사도 무죄 확정
3일 연합인포맥스가 입수한 서울고등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지난 5월 20일 김병건 BK메디컬그룹 회장이 이 전 의장을 상대로 낸 120억원 규모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김 회장의 항소를 기각했다.
앞서 1심에서도 김 회장의 청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 회장은 2018년 빗썸 경영권 인수에 나섰던 인물이다. 그는 이 전 의장 측과 빗썸 지분을 3억4천754만달러에 사들이는 주식매매계약을 체결하고, BXA 상장을 전제로 계약금 명목의 1억달러 상당을 지급했다.
김 회장 측은 양측이 각각 2천500만달러를 투자하고 나머지 약 3억달러는 BXA코인 판매대금이나 재무적투자자(FI) 유치로 조달하기로 합의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 같은 자금조달 합의가 있었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BXA 상장이 무산되고 김 회장이 잔금을 마련하지 못하면서 인수 자체가 좌초됐다. 김 회장은 이 전 의장이 상장을 거짓 약속해 자신을 기망했다며 계약금 일부인 120억원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법원은 상장을 확약했다고 볼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전 의장은 같은 사안을 둘러싼 형사 재판에서도 무죄가 확정됐다.
검찰은 2021년 이 전 의장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로 기소했으나 1·2심 모두 무죄가 선고됐고, 대법원은 2025년 3월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다. 1심이 상장 확약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단한 데 이어, 항소심도 무죄 판단이 타당하다고 봤다.
◇상장 의무 조항, 계약서에서 지워졌다
주목할 대목은 소송의 승패가 아니라 판결문에 담긴 사실관계다.
두 당사자가 체결한 코인발행약정서 제1조에는 "암호화폐 발행 후 글로벌거래소 또는 빗썸의 상장을 최우선으로 진행한다"는 문구가 담겼다. 이 전 의장이 약정 당사자로 직접 이름을 올린 조항이다.
이 전 의장이 상장 구조를 스스로 설명한 발언도 판결문에 적시됐다.
그는 계약 체결 전인 2018년 8월 30일 대화에서 "5천만개 개당 3불 하면 1억5천만불을 모집받고 에어드랍을 하는 거죠. 에어드랍 형태가 실제적인 판매 개념인 거고요. 상장 전에 쫙 뿌려주고 상장되면 가격이 형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빗썸은 2019년 1월 2일 BXA코인 상장 공지를 게시하고 이용자들에게 '에어드랍' 명목으로 코인을 지급했다.
상장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재판부는 "이 전 의장이 해당 코인을 상장할 의사가 없었다면 오히려 논란을 키울 수 있는 공지를 게시할 이유가 없다"며 상장 의사 자체는 있었다고 판단했다.
계약서가 다듬어진 과정도 판결문에 드러난다. 최초 초안에는 코인 상장 의무 조항과 상장이 무산되면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는 조항이 담겨 있었으나, 13차례 수정을 거치며 이 전 의장 측 요청으로 모두 삭제됐다.
코인을 거래소에 상장할 '자격·능력·권한을 보유하고 있다'는 진술·보장 조항도 함께 빠졌다.
김 회장 측은 "계약서에서 상장을 언급하면 감독기관으로부터 제재를 받을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삭제를 요구받았다"고 주장했다.
빗썸은 이와 관련한 연합인포맥스의 코멘트 요청에 별도의 입장을 내지 않았다.
가상자산 거래소가 시세 조종 관련 의혹으로 사법 절차를 거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두나무 창업자인 송치형 회장도 1천억원대 자전거래(자기 계정 간 매매로 거래량·시세를 부풀리는 행위)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으나,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대주주가 상장 약정 당사자인데…심사·제재할 법 없다
결국 거래소 대주주가 특정 코인의 상장을 '최우선으로 진행한다'는 약정의 당사자가 되고 상장 전 코인 배포 구조까지 직접 설명했는데도, 이를 심사하거나 제재할 근거 법령은 어디에도 없었다. 형사·민사를 통틀어 이 전 의장에게 책임을 물을 법적 고리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증권시장에서 상장은 한국거래소 상장규정과 금융당국의 감독 아래 이뤄진다. 반면 가상자산의 거래지원 결정은 전적으로 개별 거래소의 몫이다. 대주주나 임원의 상장 관여를 차단하는 이해상충 규제도, 의사결정 과정을 기록해 책임 소재를 특정하는 장치도 없다.
디지털자산 거래소 공동협의체(DAXA)의 거래지원 모범사례가 있지만 자율규제여서 구속력이 없고, 상장 심사의 독립성을 담보할 수단도 마련돼 있지 않다. 디지털자산기본법의 후속 입법 논의도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다.
역설적으로 이번 사안에서 상장을 사실상 걸러낸 것은 규제가 아니라 은행이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BXA 상장은 빗썸에 실명확인 입출금계정을 제공하던 제휴 은행이 '이용기관의 특수관계인이 금융당국 지침을 위반해 고객 피해가 우려되면 계좌 서비스를 중단할 수 있다'는 조항을 계약에 새로 넣으면서 무산됐다. 공적 상장 심사 장치가 없다 보니, 논란이 된 대주주 연계 상장을 제동한 것이 은행의 사적 계약상 권한이었던 셈이다.
금융권에서는 금융회사지배구조법상 책무구조도가 시행되면서 임원별 책무를 사전에 문서로 특정하고 내부통제 실패 시 책임을 묻는 체계가 자리 잡았다. 원화 거래소의 상장·상장폐지 의사결정에도 책임자를 사전에 지정하고 대주주 관여를 기록·차단하는 수준의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국회에는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안이 여럿 발의돼 있다.
지난해 6월 발의된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안의 경우 디지털자산업자의 지배구조·내부통제 의무를 규정하고, 상장 심사를 협회 산하 거래지원적격성평가위원회로 이관해 이해상충을 차단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러나 어느 발의안에도 임원별 책무를 사전에 문서로 특정하고 내부통제 실패 시 책임을 묻는 금융회사지배구조법상 책무구조도에 상응하는 장치는 담기지 않았다.
이번 사안처럼 대주주가 상장에 관여하더라도 의사결정 책임 소재를 특정할 수단이 여전히 없는 셈이다.
차상진 법무법인 비컴 대표변호사는 "국회에 발의된 디지털자산기본법안들은 세부 내용에 차이가 있지만 하나같이 자본시장법과 금융회사지배구조법을 참조 조문으로 축조됐다"며 "금융회사지배구조법상 임원책임제도와 책무구조도는 자본금 5억원짜리 투자일임사에도 적용되는 만큼, 수십조원대 자산을 다루는 거래소만 제외할 정책적 근거가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bhjeon@yna.co.kr
전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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