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호기롭게 빼든 칼은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지난 8일 오후, 흥국자산운용 주식운용본부는 SK하이닉스 이사회 앞으로 주주서한을 보냈다. 거버넌스 훼손을 정면으로 지적한 서한이었다. 그러나 채 하루 만인 9일 오후, 흥국운용은 이 서한을 철회했다.
단순 해프닝으로 넘기기엔 뒷맛이 쓰다. 기관투자자의 수탁자 책임 활동이 하루 만에 '철회'되는 나라에서 스튜어드십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서한의 내용은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이사회 구성원도 아닌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이사회 심의도 거치지 않은 채 대통령과 함께 1천100조 원대 투자 계획을 먼저 발표한 것은 '이사회 패싱'이라는 지적이었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도 이날 같은 문제를 짚었다. 주주서한에서 충분히 지적할 수 있는 주제였다.
그런데 회사는 상식적 제안을 '개인의 일탈'로 치부했다. "본부장 개인의 의견일 뿐 회사 입장이 아니다." "정식으로 내부 결재를 밟은 상황이 아니었다." 꼬리를 자른 것이다.
운용업계는 고개를 젓는다. 대기업을 상대로 기관투자자 명의의 공식 서한을 보내는 일이 준법감시 부서의 검토 없이 본부장 단독으로 이뤄질 리 없다. 컴플라이언스를 다 거쳐서 나간 서한을 두고 절차가 미비했다고 말하는 회사를, 시장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흥국자산운용의 대주주는 태광그룹이다. 태광그룹의 거버넌스는 국내 최하위권으로 평가받는다. 그런 태광 계열의 운용사가 다른 기업의 거버넌스를 지적했다가, 채 하루가 안 돼 꼬리를 내렸다. 그룹 차원의 후진적 거버넌스가 자사 운용사의 입을 막아버린 것 아니냐는 의심이 업계에서 나온다.
운용사의 주주 활동이 압박을 받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한국의 재벌과 대기업은 자산운용사의 주요 출자자(LP)이자 금융거래의 '갑(甲)'이다. 이 자본력으로 운용사의 목줄을 쥔다.
올해 초 정기 주주총회에서는 대형 손해보험사가 자기 돈을 맡긴 운용사들에 의결권 행사를 압박한 사례가 보도됐다. 과거에는 대형 금융지주 계열 운용사가 행동주의 캠페인을 벌이자, 상대 기업이 지주에 항의해 캠페인을 접게 만든 사례도 있었다.
증권사에 전화를 돌려 특정 운용사와의 거래를 끊으라고 압박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소신을 지킨 대가로 보복이 돌아오는 구조 속에서, 기관투자자들은 침묵을 학습 당한다.
금융위원회는 최근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 10년 만에 대대적으로 개정하겠다며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수탁자 책임 범위에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요소를 확대하고, 이행 여부를 점검해 공개하는 '이행점검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내용이 골자다.
코스피·코스닥 상장사 중 PBR(주가순자산비율)이 1배 미만인 기업이 여전히 절반(53.5%)을 넘는 현실에서, 기관투자자가 '자율과 책임의 균형' 아래 적극적인 주주활동을 펼쳐야 한다는 당국의 지적은 백번 지당하다.
그러나 독립적인 의결권 행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외압을 가한 기업을 강력하게 제재하는 방패막이가 없다면 스튜어드십 코드는 한낱 종이 위의 선언에 그칠 뿐이다.
제보 센터를 만들어 압박 정황을 접수받든, 금감원이 직접 나서 독립적 의결권 행사를 보장하겠다고 못 박든, 시장이 체감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펀드매니저가 자신의 목을 걸고 대기업의 전횡에 쓴소리를 뱉을 수 있겠는가.
정부는 연일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와 '밸류업'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자본시장의 지극히 당연한 상식을 말했다는 이유로 펀드매니저의 입이 막히고, 운용사가 하루 만에 백기를 드는 것이 우리의 서글픈 현주소다. 구조적 외압으로부터 기관을 보호하지 못하는 밸류업은 결국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흥국운용의 펀드매니저는 수탁자로서의 본분을 다했을 뿐이다. 비판받아야 할 쪽은 압박에 굴복해 목소리를 지워버린 회사와, 음성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들이다. 이번 촌극은 한국 자본시장의 견고한 '침묵의 카르텔'에 또 하나의 씁쓸한 선례를 보탰다.(증권부 이규선 기자)
[연합뉴스TV 제공]
kslee2@yna.co.kr
이규선
kslee2@yna.co.kr
함께 보면 도움이 되는
뉴스를 추천해요
금융용어사전
금융용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