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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두의 금융나침반] 디지털자산 시대와 은행의 새 역할

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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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자산을 둘러싼 논의는 자주 코인 가격이나 새로운 투자상품 이야기로 흘러간다. 어떤 토큰을 발행할 것인가, 어떤 상품을 팔 수 있을 것인가, 은행이 새 수익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가 관심의 중심에 선다. 그러나 디지털자산 전환의 본질은 그보다 깊다. 이는 특정 코인의 문제가 아니라 은행의 본업이 작동하는 인프라가 바뀌는 문제다.

은행의 역사를 돌아보면 은행은 늘 인프라 변화에 맞춰 자기 역할을 다시 정의해왔다. 처음 은행의 이미지는 금고에 가까웠다. 고객은 지점에 와서 현금을 맡겼고, 은행은 실물 가치를 안전하게 보관했다. 이 시기 은행의 핵심 역량은 물리적 보관 능력이었다. 튼튼한 금고, 지점, 창구가 신뢰의 상징이었다.

이후 종이 장부의 시대가 왔다. 은행은 단순히 현금을 보관하는 기관을 넘어 거래를 기록하는 기관이 되었다. 고객의 예금과 지급 내용이 장부에 남았고, 수표와 같은 지급수단도 확산했다. 은행의 역할은 금고에서 장부로 확장됐다. 돈을 보관하는 것만큼이나, 누가 얼마를 가지고 있고 어떤 거래가 이루어졌는지를 정확하게 기록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그다음은 전산원장의 시대였다. 계좌 시스템이 고도화되고, 신용카드와 인터넷뱅킹, 모바일뱅킹이 등장했다. 고객은 더 이상 지점에 가지 않아도 금융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은행은 종이 장부를 디지털 장부로 바꾸었고, 결제망과 계좌 시스템을 통해 예금, 대출, 지급결제, 수탁 업무를 운영했다. 이 과정에서 은행의 고객 접점은 창구에서 ATM으로, 인터넷으로, 모바일 앱으로 계속 확장됐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 속에서도 바뀌지 않은 본질이 있다. 은행의 본질은 금고 그 자체가 아니다. 은행의 본질은 금융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한 신뢰 인프라를 제공하는 능력이다. 고객의 돈이 안전하게 보관되고, 거래가 정확하게 기록되며, 지급과 정산이 제대로 끝나고, 법과 규제안에서 금융이 안정적으로 작동한다는 믿음이 은행의 핵심 가치였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전환의 입구에 서 있다. 일부 금융거래와 자산의 기록, 이전, 결제가 전통적인 은행 내부 전산원장만이 아니라 분산 원장이나 공통 원장 위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기존 금융 인프라에서는 각 기관이 자기 장부를 따로 관리했다. 은행은 은행 장부를, 증권사는 증권사 장부를, 결제기관은 결제기관 장부를 가지고 있었다. 거래가 발생하면 각자의 시스템에 기록이 남았다. 그리고 거래 이후 서로의 기록이 맞는지 확인하는 대사 과정이 필요했다. 메시지가 먼저 움직이고, 실제 정산은 그 뒤에 별도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공통 원장 또는 상호운용 가능한 디지털 원장에서는 이 구조가 달라질 수 있다. 자산의 이전, 권리관계, 거래 조건, 정산 정보가 하나의 원장 또는 연결된 원장 위에서 함께 기록될 수 있다. 거래가 끝난 뒤 장부를 맞춰보는 부담은 줄어들고, 조건이 충족되면 자동 또는 실시간 정산이 가능해진다.

공통 원장 시대라고 해서 은행의 역할이 위협받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은행의 역할이 수행되는 방식이 바뀐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장부의 형태가 바뀌어도 금융에는 여전히 신뢰가 필요하다. 누군가는 고객을 확인해야 한다. 누군가는 자금세탁 위험을 통제해야 한다. 누군가는 디지털 자산을 안전하게 보관해야 한다. 누군가는 상환과 정산의 신뢰를 제공해야 한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책임 있게 대응하는 주체도 필요하다.

오히려 원장이 개방되고 거래가 자동화될수록 이런 신뢰 기능은 더 중요해진다. 더 많은 참여자가 연결되고, 더 많은 자산이 원장 위에서 이동하며, 더 많은 거래가 조건에 따라 자동 실행될수록 금융시스템의 안전장치는 더 정교해야 한다. 따라서 공통 원장 시대에 은행이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은행 장부를 계속 독점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어떤 원장 위에서도 은행의 신뢰 기능을 어떻게 제공할 것인가"이다.

예금 기능은 토큰화된 결제와 기업 재무관리 시스템으로 확장될 수 있다. 수탁 기능은 디지털 자산 보관과 키 관리, 권리 관리로 확장될 수 있다. 정산 기능은 자본시장 결제와 플랫폼 정산, 국경 간 결제와 연결될 수 있다. 규제준수 기능은 KYC, AML, 거래 모니터링, 데이터 접근 권한 관리와 결합할 수 있다. 은행의 본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원장 위에서 다시 설계되는 것이다.

이 변화는 은행에 부담이기도 하지만 기회이기도 하다. 은행이 기존 계좌 망 안에만 머문다면 고객 접점과 거래 흐름의 일부를 놓칠 수 있다. 반대로 은행이 신뢰, 수탁, 정산, 위험관리, 규제준수 역량을 새로운 디지털 인프라와 연결한다면 역할은 더 넓어질 수 있다. 금고에서 종이 장부로, 종이 장부에서 전산원장으로 이동했듯이, 앞으로 많은 금융 기능이 공통 원장과 토큰화된 인프라 위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은행의 미래는 장부를 혼자 보유하는 데 있지 않다. 어떤 장부 위에서든 신뢰받는 기능을 제공하는 데 있다. 디지털자산 전환은 은행 본업의 쇠퇴가 아니라, 은행 본업을 더 넓은 디지털 금융 인프라 위로 확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손병두 토스인사이트 대표)

장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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