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아 크랩 로베코자산운용 APAC 주식운용 대표 인터뷰
"코스피 랠리는 리레이팅 아닌 디레이팅 중…비중 축소할 이유 없다"
"AI 랠리 식는 순간 코리아 밸류업 정책 효과 나타날 것"
[출처: 로베코자산운용]
(서울=연합인포맥스) 전병훈 기자 = "2024년 말 서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밸류업이 좋은 일들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계엄이 터졌죠."
조슈아 크랩(Joshua Crabb) 로베코자산운용 아시아태평양(APAC) 주식운용 대표가 20일 연합인포맥스와의 인터뷰에서 떠올린 1년 7개월 전의 기억이다. 크랩 대표는 "계엄까지 터지자 솔직히 (판단이 틀렸을까 봐) 걱정됐다"면서도 "하지만 시장은 그 뒤 예상했던 대로 흘러갔다"고 했다.
코스피는 올해 상반기에만 100% 이상 올라 닷컴버블이 한창이던 1999년의 상승률(56.99%)을 넘어서면서 역대 최고 상반기 상승률을 기록했다.
다만 최근 시장이 인공지능(AI) 랠리로 뜨겁게 달아오른 지금, 크랩 대표의 관점은 달라져 있었다. 그는 "AI 랠리는 초입이 아니라 이미 후반부에 들어섰다"며 "모멘텀이 6개월, 12개월 더 갈 수는 있지만, 비중이 크다면 차익을 실현해 소외된 영역으로 옮길 때"라고 진단했다.
현재 AI 랠리로 소외된 시장이야말로 AI 주가가 흔들릴 때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유망 투자처로 동남아·인도 등 신흥국과 통신·헬스케어 업종을 지목했다.
◇ "코스피, 두 배 올라도 다시 싸지는 중…비중 줄일 이유 없다"
운용자산만 4천억달러에 가까운 로베코는 13개국에 글로벌 오피스를 둔 유럽계 액티브 자산운용사다. '투자 엔지니어(The Investment Engineers)'를 자처하는 회사답게 크랩 대표는 시장이든 종목이든 밸류에이션 판단에 앞서 기준점부터 따졌다.
2024년 말 그가 본 한국의 출발점은 바닥이었다. 엔비디아가 높은 밸류에이션에 거래되는 동안, AI의 핵심 부품인 HBM을 만드는 한국 반도체주는 저평가돼 있었다. 격차는 누구나 봤지만 크랩 대표는 위험의 크기가 다르다는 점을 읽었다.
그는 "비싼 주식은 이익이 기대에 못 미치는 순간 주가가 내려갈 폭도 크지만, 이미 싼 주식은 이익이 얼마나 줄어드는지만 따지면 된다"며 "이익이 예상보다 덜 꺾이면 리레이팅이 시작되는데, 사업의 경기 변동성이 줄며 재평가를 받은 TSMC가 그 예시"라고 말했다.
코스피가 두 배로 뛴 지금도 크랩 대표가 보는 기준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주가가 이익 전망보다 빠르게 올라 밸류에이션 배수가 높아지는 리레이팅(re-rating)이 아니라, 이익이 주가보다 가파르게 불어나며 배수가 오히려 낮아지는 디레이팅(de-rating) 국면이라는 진단이다.
그는 "주가수익비율(PER)이 12배에서 15배까지 올랐지만, 이후 이익 전망이 급증하면서 시장은 오히려 다시 싸지고 있다"며 "지금 국면은 리레이팅이 아니라 디레이팅이고, 이익이 주가를 따라오지 못하는 미국과는 정반대"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차익을 실현해 소외된 영역에 재투자할 때는 맞지만, 비중을 줄일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 "AI 식는 순간 코리아 밸류업 빛 바래…레버리지는 극소수의 게임"
크랩 대표는 자본시장 선진화 정책에도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여전하다는 지적에 "시장의 체질 변화는 단기간에 이뤄지지 않는다"며 "지금은 모든 시선이 AI에 쏠려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 같은 주주환원이 뒷전일 뿐"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장담하건대 AI 과열이 식으면 투자자들은 주주환원에 적극적인 기업부터 다시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코스피 디스카운트가 해소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데는 일종의 착시가 있다고 짚었다.
크랩 대표는 "착시를 걷어내고 시장의 이면을 보면 기업이 주주를 대하는 태도가 분명히 달라졌다"며 "배당 확대와 자사주 매입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승계 문제로 셈법이 복잡한 기업들마저 주주환원으로 방향을 트는 점이 고무적"이라고 평가했다. 밸류에이션 매력이 남은 업종으로는 산업재와 통신, 금융을 꼽았다.
다만 크랩 대표는 이번 상승장에 올라탄 고배율 레버리지 투자에는 분명한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기초자산 가격과 파생상품의 실제 손익은 따로 움직일 수 있다"며 "레버리지 구조에 감마 위험까지 이해하는 극소수의 전문 투자자가 아니라면, 고배율 상품은 대다수에게 나쁜 선택지"라고 지적했다.
결국 크랩 대표가 투자자들에게 건네는 조언은 자신이 한국에서 증명한 원칙과 같다. 시장이 뜨거울 때 올라타는 것이 아니라, 싸고 소외됐을 때 주목하라는 것이다.
그는 "시장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 사람들은 빨려 들어간다"며 "잃어도 되는 돈만, 자기 상황에 맞는 상품에, 천천히 꾸준히 나눠 투자한다면 투자는 인생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bhjeon@yna.co.kr
전병훈
함께 보면 도움이 되는
뉴스를 추천해요
금융용어사전
금융용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