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김형균의 주주자본주의] 투자자 설 곳 없는 한국 자본시장

26.07.22.
읽는시간 0

한국 주식시장에서 투자자는 오랫동안 찬밥 신세였다. 지배주주는 일반주주의 이익을 훼손하는 이해 상충 거래를 일삼았고, 근로자는 노동조합을 통해 자신의 이해를 대변해 왔다. 정치권 역시 이 두 주체의 이해에는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일반 투자자의 권익은 오랫동안 외면했다. 일반 투자자는 지배주주와 노동자 사이에 끼어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다.

일반 투자자의 권리가 정치권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주식투자 인구가 전체 인구의 30%에 육박한 최근의 일이다. 최근 몇 차례 상법 개정을 통해 이사가 전체 주주를 위해 직무를 수행하고 전체 주주의 이익을 공평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도 비로소 법에 명시됐다.

물론 법이 바뀌었다고 현실이 곧바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상법 개정 이후에도 일반주주의 부를 지배주주나 특정 이해관계자에게 이전하는 기업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시장과 언론의 감시를 받는 대기업보다 관심의 사각지대에 있는 중소형 상장회사에서 이런 일이 더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를 해결하려면 특정 주주가 아니라 전체 주주를 위해 실제로 일하는 이사회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형식적인 절차 준수만으로 실질적인 불공정을 눈감아 온 법원의 태도도 달라져야 한다. 잘못된 이사의 행위에 대한 소송이 실질적으로 기능하게 하려면 증거개시제도와 상사전문법원의 도입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전체 주주의 재산권이 보호되는 정상적인 자본주의에 도달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른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일부 진영에서 주주를 탐욕스러운 집단으로 취급하고, 기업의 이익을 근로자나 협력업체 또는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14일 고용노동부가 개최한 토론회에서는 노동계 인사가 "주주가 기업 이익 자체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근로자는 임금과 퇴직금에 대한 청구권을 갖고, 채권자는 원금과 이자에 대한 청구권을 가지며, 정부는 세금을 부과한다. 주주는 이들의 계약상, 법률상 청구권이 충족된 뒤 남는 기업가치에 대한 잔여청구권자다. 사업이 실패했을 때 남는 위험도 주주가 부담한다.

기업의 이익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는 사회적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논의는 법과 계약, 소유권의 질서를 전제로 해야 한다. 기업 이익의 최종적인 경제적 귀속에서 주주를 배제하는 것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소유권 질서를 부정하는 주장이다.

자주 제기되는 또 다른 주장은 투자자의 단기주의가 기업의 성장 동력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을 요구하는 투자자 때문에 경영진이 연구개발과 설비투자를 소홀히 하고, 단기 실적에 매몰돼 기업의 장기 경쟁력이 약화한다는 주장이다.

며칠 또는 몇 달 만에 주식을 사고파는 투자자를 오랫동안 주식을 보유한 주주와 똑같이 대우하는 것이 맞느냐는 주장도 뒤따른다. 이런 비판의 화살은 종종 기업의 거버넌스와 자본 효율성을 개선하려는 행동주의 펀드에도 향한다.

그러나 하나씩 따져보면 근거가 약하다.

우선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단기주의인가. 기업이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투자 기회를 갖고 있고, 그 투자에서 얻을 수 있는 수익률이 자본비용보다 높다면 당연히 재투자가 우선이다. 제대로 된 투자자라면 성장 기회가 충분한 기업에 무리한 배당을 요구하지 않는다.

한국 상장기업의 문제는 정반대다. 수년, 수십 년 동안 주가가 내재가치보다 현저히 낮은데도 현금을 쌓아 두고, 수익성 있는 투자에도 사용하지 않으며,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소각도 하지 않는 기업이 많다.

이것은 장기주의가 아니라 자본배분의 실패다. 능력 없는 경영진이 자본을 회사 안에 쌓아 두는 것보다 이를 주주에게 돌려주고, 주주가 더 생산적인 기업과 산업에 다시 투자하도록 하는 것이 자본의 선순환이다. 장기간 자본배분에 실패한 기업에 주주환원을 요구하는 것을 단기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한국 자본시장의 현실을 외면하는 주장이다.

두 번째로, 주식을 짧게 보유하는 투자자는 기업에 단기 경영을 강요하는 나쁜 투자자인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주식시장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면 정반대의 결론이 나온다.

단기 투자를 가능하게 하는 상장 주식시장이야말로 기업의 장기 투자를 가능하게 한다.

기업에 자본을 납입한 투자자가 필요할 때마다 기업에 직접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면 경영자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 없다. 기업이 10년을 내다보고 공장을 지었는데 주요 투자자가 갑자기 자본을 회수하겠다고 한다면, 기업은 공장이나 사업을 매각해 투자금을 돌려줘야 할 수도 있다.

주식시장은 투자자가 기업으로부터 자본을 회수하는 대신 다른 투자자에게 주식을 팔 수 있게 한다. 기존 주주는 빠져나가지만, 그 지분은 새로운 주주가 이어받는다. 기업 안에 들어간 자기자본은 그대로 남는다.

상장시장의 유동성은 투자자에게 언제든 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고, 기업에는 장기간 사용할 수 있는 영구자본(permanent capital)을 제공한다. 투자자의 단기 매매와 기업의 장기 경영은 서로 충돌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투자자의 단기 매매를 가능하게 하는 유통시장의 메커니즘이 기업의 장기 경영도 가능하게 한다.

개별 투자자는 끊임없이 바뀌지만, 주주 전체로서의 자본은 기업에 계속 남아 있다. 유통시장에서 잠시 주식을 보유한 투자자도 앞선 투자자가 가졌던 권리를 이어받는다. 따라서 이들을 서로 분리된 단기 투자자로만 볼 것이 아니라 기업의 영구자본을 집합적으로 제공하는 투자자 집단으로 봐야 한다.

우리 몸의 세포가 끊임없이 죽고 새로 태어난다고 해서 인간 자체가 단기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주주의 손바뀜이 계속된다고 해서 기업에 공급된 자본까지 단기자본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투자전략의 관점에서 단기투자와 장기투자 중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지는 별개의 문제다. 주가의 단기 등락을 매번 맞히는 것보다 장기적으로 복리 성장하는 좋은 기업을 찾아 오래 보유하는 편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장기투자를 장려한다는 이유로 단기 투자자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장기 보유 주주에게 더 큰 권리를 줘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장기투자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투자자를 주식에 묶어 두는 제도가 아니라 투자자가 안심하고 오래 머물 수 있는 시장을 만드는 것이다.

지배주주와 경영진이 일반주주와 같은 배를 타도록 하고, 합병, 분할, 유상증자, 자사주 처분 등을 이용해 일반주주의 부를 가져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기업의 의사결정이 공정할 것이라는 신뢰가 생겨야 투자자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주식을 보유할 수 있다.

한국 주식시장의 단기투자 문화는 민족적 특성이 아니다. 기업 경영진에 대한 불신의 산물이자 지배주주의 수탈을 피하기 위해 투자자들이 체화한 진화론적 행동 양태에 가깝다. 주가가 오를 때 팔지 않으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가치가 훼손될지 알 수 없다는 경험이 투자자를 단기적으로 행동하게 했다.

따라서 단기투자를 탓하기 전에 투자자가 기업을 믿지 못하는 이유부터 제거해야 한다. 공평한 운동장을 만들고, 지배주주와 경영진의 기회주의적 행동을 막고, 주주의 재산권을 법원이 실질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투자자는 주어진 제도와 인센티브에 적응한다. 투자자는 죄가 없다. 다만 적응할 뿐이다.

(김형균 차파트너스자산운용 본부장/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부회장)

장순환

장순환

금융용어사전

KB금융그룹의 로고와 KB Think 글자가 함께 기재되어 있습니다. KB Think

금융용어사전

KB금융그룹의 로고입니다. KB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KB Think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