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윤종규 전 KB금융 회장이 최근 광화문 변호사회관에 있는 사무실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홀연히 떠났다. KB금융 고문직을 스스로 일찌감치 내려놓기로 하면서 금융인의 사랑방이 갑작스레 사라졌다. 크고 작은 조언을 구하기 위해 윤 전 회장의 사무실을 찾았던 이들이 '이제 회장님은 어디에 계시는 거냐'고 수없이 문의해왔다.
윤 전 회장은 지난 21년간 함께해 온 KB와 연관된 모든 것을 끊어내고 자연인으로 돌아갔다. 각 잡힌 재킷을 벗고 시원한 반소매티의 캐쥬얼룩으로 '무소속'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는 모습이 아직은 어색하다. 영원히 노란 넥타이를 매고 있을 거 같았던, "퇴임 후에도 가슴 속에 노란 피를 지닌 자랑스러운 KB인으로 최선을 다해 살겠다"고 다짐했던 그는 왜 1년이나 일찍 KB와 절연하기로 결심했을까.
윤 전 회장은 어려서 꿈이 없었다고 한다. 하루하루 살아내기도 버거웠던 가정 형편에 서울의 명문대나 고시 합격 같은 목표를 희미하게나마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그가 10살 정도 무렵 시골 분교에서 겨울방학 특별활동으로 주산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다루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이를 눈여겨본 스승으로부터 그가 살던 전남 나주 남석리 주산 대표로 출전할 것을 권유받았다. 그는 군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고 지역 대회를 휩쓸었다.
공부는 참 잘했지만 학비 걱정이 앞섰던 그는 광주상고 수석 졸업후 한국은행 대신 외환은행에 취직했다. 서울 상도동 은행 합숙소에서 지내며 그는 인생 처음으로 야간 대학 진학이라는 꿈이 생겼다. 1년간 학비를 모으면서 입시 준비를 했고 성균관대에 합격했다. 은행 퇴근 후 야간 수업을 듣고 새벽 2시까지 공부를 했다. 하루 4시간 수면의 생활을 하면서 회계사 시험을 준비했고 1년 만에 그해 57명만 뽑는 데 합격했다. 4학년 때 행정고시에도 합격하면서 대학 졸업 전 회계사 시험과 행정고시 합격이라는 문과 천재가 할 수 있는 성과를 두 가지나 이뤄냈다.
삼일회계법인에서 천재 회계사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최연소로 부대표까지 오른다. 그러다 고(故) 김정태 국민은행장과 인연으로 47세이던 2003년 국민은행 부행장으로 금융계에 입문하게 된다. 이때부터 KB와 길고 긴 인연이 시작된다. 첫 번째 연은 2004년 9월 감독당국으로부터 KB국민카드 합병 회계 처리와 관련 '누명' 징계를 받고 자진사퇴하면서 끊어졌다. 한순간에 일과 목표를 모두 잃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2008년 9월 KB금융지주가 출범하고 3년 뒤 취임한 어윤대 회장이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가 원했던 은행장 자리 제안은 아니었지만, KB로 돌아갈 타이밍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더 컸던 그는 지주 최고재무책임자(CFO) 복귀한다.
그 이후에도 KB와의 인연은 순탄치 않았다. 지주 회장이 바뀌고 지배구조가 재정비되는 과정에서 차기 행장 문턱에서 좌절한 그는 KB 2기 시절을 마무리하고 김앤장 고문으로 돌아갔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KB에서 짐을 싸고 나왔으니 윤 회장 자신도 'KB와 나는 더 이상 인연이 아니다'라고 체념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듬해 금융계를 강타한 'KB 사태'가 지주 회장에 오르게 돕는다. KB금융에서 청와대나 금융당국의 입김 없이 오로지 사외이사들의 투표로 회장직에 오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늘은 윤 회장을 택했다. 남석리 주산 대표 선수가 꾼 오랜 꿈이 이루어진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윤 전 회장은 3연임을 했다. 외풍이 심한 KB 역사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늘 경쟁사인 신한금융지주에 밀렸던 KB는 윤 전 회장이 이끈 9년 동안 환골탈태했다. '혼자 다 해 먹는다'는 평가가 나오지 않도록 그는 실력으로 압도했다. 단순히 숫자만으로 KB금융을 초격차 리딩금융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 아니라 조직문화를 재정립했다. 윤 전 회장이 가장 높이 평가받는 부분은 낙하산 인사가 언제든 내려와 권력 앞에 줄을 세우지 못하도록 경영승계 프로세스를 정립한 부분이다. 그는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외풍이 불지 못하도록 KB의 지배구조를 바꿔놨다. 이제는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나도 한 번 KB금융 회장에 뛰어볼까, 밀어달라는 부탁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2023년 그가 물러날 때 과연 안정적 경영승계가 가능할 것인가 의문을 품는 이들이 많았다. 아니, 어쩌면 흔들리길 바랐을지도. 거액의 특별퇴직금을 받지 못해 서운해한다 라던가 이런저런 이유로 현 회장과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둥 각종 구설수가 끊이지 않았지만 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행여 현 회장에게 부담이 될까 고문 사무실도 퇴임한 지 한 참 뒤에서야 마련했다. 그는 한발 물러난 자리에서 지난 2년간 묵묵히 KB의 등대가 되어줬다.
이제 KB는 또 한 번의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양종희 회장은 오는 11월 임기 만료를 앞두고 연임에 도전한다. 현재 KB 회장후보추천위원회는 6명의 차기 회장 후보를 압축했다. 다음달 말이면 3명으로 좁혀지고 9월에 최종 단독 후보가 선정된다. 윤 전 회장이 1년이나 일찍 방을 빼며 KB와의 절연을 선언한 것은 이 과정에서 본인의 그림자가 부담될 수 있다는 판단이 깔린 듯하다. 그가 물러난 뒤에도 3년 동안 흔들리지 않고 초격차 리딩금융그룹을 지키고 있는 든든한 모습을 봤고, 후임자가 또 다른 3년을 위해 도전하는 시간이 왔으니 이제는 조금 더 멀리 떨어져서 응원해도 되겠다는 안도감이 작용했던 거 아닐까.
윤 전 회장이 KB와의 세 번째 인연을 스스로 끊은 것은 그의 마지막 꿈을 이루기 위해서란 관측도 나온다. 그는 최초로 '금융의 삼성전자'를 만들고 싶어 했다. 이제 그 꿈은 후배들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그가 뿌리내린 토양에 꽃이 피기 시작했으며 열매를 맺고 수확을 하는 것은 이제 후배들의 몫이다.
집착과 집념은 다르다. 역대 국내 금융지주 회장 가운데 대부분이 자리에 집착해 말년이 좋지 않았던 것과 달리 윤 전 회장은 집념으로 KB금융과의 인연을 스스로 끊어냈다. 그가 많은 금융인으로부터 존경받는 이유다. (금융부장)
hjlee@yna.co.kr
이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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