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운용원칙을 바꾼 국민연금이 이번에도 비판의 화살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운용원칙 바꿀 때마다 역풍 맞은 국민연금
국민연금은 코로나19 이후 동학개미 열풍이 불던 시기, 전략적 자산배분(SAA) 허용범위를 기존 ±2%포인트에서 ±3%포인트로 넓히며 국내주식 보유 여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이듬해 증시가 급락하면서 국내주식 수익률은 마이너스(-)22.8%를 기록했다.
당시 '국민연금 매도세가 주가 상승을 막는다'는 외부 압박에 의해 원칙을 바꾼 것 아니냐는 지적을 피하지 못했다.
반도체 호황으로 코스피가 급등한 이번에도 국민연금은 다시 운용원칙을 건드렸다.
올해 1월 국내주식 목표비중을 14.4%에서 14.9%로 높이고 리밸런싱을 한시적으로 유예했다. 이어 5월에는 목표비중을 20.8%로 확대하고 허용범위도 ±3%포인트에서 ±6%포인트로 넓혔다.
코스피가 8천선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기계적인 대규모 매도가 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판단이 반영된 결정이었다.
하지만 시장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코스피는 9천선을 찍은 뒤 이달 들어 5천선대로 밀렸다.
그 결과 국민연금은 급락장에서도 방파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과 고점에서 수익을 확정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동시에 받고 있다.
◇기존 원칙이어도 '방파제' 역할 어려워…수익도 비슷
하지만 이 같은 비판은 절반만 맞다. 기존 규칙을 유지했더라도 지금쯤 국민연금이 대규모 매수에 나섰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기존 규칙을 유지했다면 국민연금은 코스피 4,200선 부근부터 국내주식을 기계적으로 매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상승장에서 대규모 매도 물량이 나오지 않았던 것은 리밸런싱 유예와 국내주식 비중 상향 덕분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원칙대로 매도했다면 코스피가 9천선까지 오르기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과 같은 5천선에서는 기존 규칙이라고 해서 국민연금이 대규모 매수에 나설 가능성이 컸던 것도 아니다.
기존 규칙에서는 국내주식 비중이 11.4%를 하회해야 기계적 매수 구간에 진입한다. 국민연금이 기존 규칙대로 매도를 이어갔더라도 7월 말 국내주식 비중은 여전히 약 19% 수준에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반기 코스피 급등으로 국내주식 비중이 크게 높아진 만큼 어느 규칙을 적용했더라도 현재 지수에서는 국민연금이 기계적 매수에 나설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는 의미다.
올해 동안 벌어들인 수익을 단순 추정해봐도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물론 코스피가 9천선을 돌파했던 시점과 현재를 비교하면 국내주식 평가액이 200조원 넘게 줄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올해 내내 국내주식으로 거뒀을 확정수익과 평가수익의 합산 추정치를 비교하면 기존 규칙과 변경된 규칙에서 모두 90조원 안팎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추산된다.
두 가정에서의 차이는 확정수익과 평가수익의 비중일 뿐이다. 코스피가 앞으로 더 하락한다면 바뀐 규칙이 불리하겠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어느 선택이 절대적으로 옳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진짜 문제는 '원칙 훼손'…장기 투자자답지 않았던 선택
국민연금의 진짜 문제는 장기 운용원칙을 훼손했다는 점이다.(연합인포맥스가 지난 6월 1일 송고한 '국민연금의 '고무줄' 운용 원칙…외국인 수익실현할 때 뒷짐 우려도' 제하의 기사 참고)
국민연금은 그동안 시장은 결국 장기 평균으로 회귀한다는 전제 아래 리밸런싱 원칙을 운영해 왔다. 그런데 올해는 국내 증시의 구조적인 재평가가 이어질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반영해 운용원칙을 수정했다.
장기 투자기관이 특정 시장 전망을 전제로 자산 배분 원칙 자체를 바꾼 셈이다.
국민연금이 기계적인 리밸런싱에 나섰다면 국내 증시의 상승 속도는 지금보다 완만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당시에는 상승장에 찬물을 끼얹는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겠지만, 외국인 투자자들이 차익을 실현하며 빠져나가는 동안 국민연금만 원칙을 저버린 채 시장을 받아낸 꼴이 됐다.
더구나 당시에도 다른 선택지는 있었다.
시장 충격을 줄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목표비중까지 올릴 필요는 없었다. 리밸런싱 기간을 늘리거나 허용범위만 확대하는 방식도 가능했다. 기계적인 대량 매도는 피하면서도 변동성 국면에서 기금운용본부가 재량적으로 대응할 여지를 조금 더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해석이 결과론일 수는 있다. 코스피가 브레이크 없이 1만을 돌파했다면 국민연금의 선택이 맞았을 수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과 같은 장기 기관투자자에게 단기 수익률은 중요하지 않다. 당장 이익을 크게 못 얻더라도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방향을 선택했어야 했다.
앞서 한 차례 비슷한 실패를 겪고도 또다시 단기 시장 상황에 맞춰 원칙을 수정했다는 점에서, 국민연금은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증권부 송하린 기자)
hrsong@yna.co.kr
송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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