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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지의 숫자 너머] 어떻게 해야 했을까

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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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H.W. 부시

[출처:인터넷 갈무리]

(서울=연합인포맥스) "잘 들으십시오. 새로운 세금은 없습니다(Read my lips: no new taxes)."

1988년 8월 18일 미국 부통령이었던 조지 H.W. 부시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후보 지명을 수락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문장은 강력한 공약으로 이어져 대선 승리에 크게 기여했지만 부시 대통령이 임기 중 세금을 올리면서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빌미가 됐다.

이재명 대통령도 부시의 길을 걸을 것인가.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주택 공급을 확대하기 위해 그린벨트를 일부 해제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린벨트가 활용된다면 윤석열 정부 이후 2년 만에 다시 그린벨트에 집을 짓게 된다.

용산과 강남 아파트 단지

[출처: 연합뉴스 자료 사진]

이재명 정부가 내걸었던 핵심 국정 기치는 '5극 3특' 중심의 국가 균형 성장 전략이었다. 수도권이라는 단 하나의 거대한 블랙홀 대신, 전국에 5개의 초광역 메가시티와 3개의 특별자치도를 육성해 인구와 자본을 전국으로 분산시키겠다는 설계였다. 반도체 공장을 수도권이 아닌 호남으로 배치한 것도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다. 수도권 일극 체제의 혼잡 비용을 줄이고 지방 소멸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이 일관된 신호는 정책의 가장 굳건한 기둥이어야 했다.

수도권 그린벨트를 풀어 집을 짓겠다는 계획은 지역 균형 발전에 정면으로 맞서는 정책이다. 이 대통령도 과거 "그린벨트를 훼손해서라도 신도시를 만들어 계속 공급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리가 있지만 지방 입장에서 보면 목마르다고 계속 소금물을 마시는 격"이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 그린벨트 해제가 가져올 지방 소멸의 가속화와 수도권 과밀 심화라는 부작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족한 공급에 대한 시장 불안과 '물량을 눈앞에 보여달라'는 목소리 앞에 정부는 결국 스스로 그어두었던 원칙을 뒤집으려 하고 있다.

내곡동 일대

[출처: 연합뉴스 자료 사진]

이러한 정책적 자가당착은 비단 공간 정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 강남구 유세 현장에서 "수요 과다로 집값이 오르면 세금으로 수요를 억압해서 가격을 관리하는 게 아니라, 공급을 늘려서 적정한 가격을 유지하도록 하겠다"면서 세제는 함부로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최근 내놓은 세제개편안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비거주 및 초고가, 다주택자에 대한 세 부담을 강화하고 투기 수요를 억제하는 데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 말로는 세제의 중립성과 공급 물량 확대를 외치면서, 행동으로는 징벌적 과세 카드와 그린벨트 훼손이라는 가장 손쉬운 억제책·임시방편책을 번갈아 꺼내 들고 있는 셈이다.

정부의 시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주택 공급 절벽에 대한 불안 심리가 집값을 자극하는 상황에서, 당장 눈에 보이는 서울과 수도권 입지에 공급 물량을 제시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클 것이다. 하지만 급하다고 해서 뿌리를 흔드는 처방을 남발해서는 안 된다. 수도권 그린벨트 해제라는 최후의 보루를 무너뜨리는 순간, 시장에 전달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사람들이 '결국 정부도 수도권 집값 앞에서는 균형 발전도, 원칙도 없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지방으로 흘러야 할 자본과 인구는 다시 수도권 그린벨트 해제 지역의 '로또 분양'과 자산 상승 기대감으로 쏠릴 것이며, 이는 지방 소멸의 기폭제가 될 것이다.

정책의 생명은 신뢰와 일관성이다. 정부가 수십 년을 내다봐야 할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백년대계와 부동산 시장의 단기적 열기를 식히는 조급함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면, 시장 참여자들은 정부의 어떠한 약속도 믿지 않게 된다. 낮에는 수도권을 분산시키는 둑을 쌓겠다고 선언하고, 밤에는 수도권으로 들어오는 물길을 터주는 정책 행보는 국정 전반의 일관성마저 갉아먹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눈앞의 불을 끄기 위해 국가의 자산이자 미래 세대의 유산인 그린벨트를 허무는 일이 아니다. 세제와 공급, 그리고 균형발전이라는 복잡한 방정식 속에서 잃어버린 정책의 원칙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섣부른 조급증이 초래한 그린벨트 해제 카드가 장차 대한민국 국토의 균형을 얼마나 크게 무너뜨릴지, 정부는 엄중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산업부 부동산팀장)

이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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