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1. 2000년대 IT 버블 당시 스타트업(벤처기업)들은 막대한 규모의 벤처캐피털(VC) 자금을 유치했다. 문제는 이 자금이 실제 시장 수요를 기반으로 한 성장을 뒷받침하기보다 자금 자체가 매출로 둔갑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데 있다. 예컨대 벤처기업이 고객사에 제품을 판매하면서 VC 자금을 제공하거나 신용공여를 해줬고, 고객사는 그 자금을 다시 해당 기업의 제품구매에 쓰는 방식이 횡행했다. 겉으로는 매출이 늘어난 것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인 서비스 이용은 아니었던 셈이다. 돈의 순환에 불과했던 이 구조는 결국 수요가 줄고 투자가 끊기면서 무너졌다. 수많은 벤처기업이 파산했고 그렇게 IT 버블이 꺼졌다.
#2. 2008년 금융위기는 더 큰 규모의 순환 구조가 만들어낸 위기였다고 평가된다. 당시 미국 금융시장은 부동산담보대출을 기반으로 한 증권화상품(MBS, CDO 등)을 무차별적으로 확대했다. 대출자의 상환능력과 무관하게 대출이 발급되고, 그 대출을 다시 금융상품으로 포장해 투자자에게 판매하는 구조였다. 겉으로는 금융상품이 다양화되고 수익성도 높아 보였지만, 실제로는 부동산 가격 상승이라는 '가짜 수요'에 의존한 셈이 됐다. 대출자가 상환능력을 잃자 연쇄적으로 금융상품 가치가 폭락했고 글로벌 금융시스템 전체가 붕괴 위기에 몰렸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실물 수요와 괴리된 금융구조'의 위험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실질 수요 없이 자금순환으로 성장한 매출은 장기적으로는 허상에 불과하다. 투자자와 시장이 성장 착시에 빠졌을 때 자금줄이 막히는 순간 거품이 걷히고 시스템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최근 빅테크들의 'AI 순환 금융'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구글은 최근 앤트로픽의 텍사스 데이터센터 건설 대출 150억달러(약 21조원)에 지급보증을 서고 지분 20%를 확보했다. 그런데 정작 그 대출을 내준 월가 은행들은 채권시장에 대출채권을 서둘러 팔아넘기고 있다. 빅테크들이 서로의 부채와 지분을 얽어매며 몸집을 불리는 AI 순환 금융구조에 금융권이 위험신호를 보내는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엔비디아의 광폭 행보에 대한 우려의 시각도 적지 않다. 엔비디아는 그래픽처리장치(GPU)와 AI 인프라를 금융 자산화하며 월가의 대형 금융사들과 5천억 달러 규모의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골드만삭스와 블랙스톤, 아폴로 등 글로벌 자본이 여기에 참여한다. 엔비디아가 직접 자금을 빌려주는 구조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금융사 등 외부 자본이 AI 인프라 투자에 참여하는 것이라 순환 금융 우려를 완화하는 효과도 기대해볼 수 있다.
문제는 엔비디아 생태계의 확장 과정이 기술공급을 넘어 금융구조로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GPU를 담보로 한 금융상품화가 실제 AI 서비스 수요와 괴리될 경우 과거 부동산 증권화와 유사한 위험을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엔비디아가 최대 25%까지 직접 투자할 수 있다고 밝힌 것도 시장의 우려를 키운다. 고객사에 직접 자금을 지원하는 비중이 늘어나면 회사의 현금흐름을 줄이게 되고, 장기적으로 기업의 재무 건전성을 해칠 수 있다. 엔비디아 생태계에 균열이 생길 가능성은 없는지 면밀하게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앞서 2026년 연례 경제보고서를 통해 AI 순환 금융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BIS는 하이퍼스케일러와 반도체제조사, AI 기업 등이 사적 계약으로 거미줄처럼 연결된 부분을 지목했다. 하이퍼스케일러와 반도체기업들이 AI 기업에 지분을 투자하면 그 기업은 다시 수년간 반도체·컴퓨팅 파워 구매를 약정하고, 데이터센터는 제3자에 의해 지어진 뒤 장기임대로 되돌아오는 식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거래의 조건은 대체로 제대로 공시되지 않으며 동일한 자산이 여러 번 담보로 잡힐 위험이 있다"고 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동일 담보가 여러 금융상품에 중복적으로 활용됐던 구조와 매우 닮아있다고 지적한다.
AI 수요 증가세가 지금처럼 지속된다면 퍼즐처럼 얽힌 AI 생태계와 순환 금융 등에 대한 우려도 기우에 그칠 것이다. 다만 수요 둔화 시점을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렵다는 게 문제다. 투자자들 입장에선 부지불식간에 찾아올 수 있는 리스크에 대비한 전략을 세워둘 필요가 있다. 최근 AI 순환 금융의 핵심 위험은 "기술이 쓸모없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필요한 수준보다 너무 많은 돈이 너무 빨리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그 돈이 다시 수요를 만드는 구조가 고착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것이다. AI 서비스가 실제 매출과 현금흐름을 충분하게,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지도 주목해야 할 대상이다. 어느 시점에 AI 순환 금융의 핵심 격인 데이터센터 수익과 GPU 담보가치 등이 흔들리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 위험이 금융시장 전반에 파급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편집국장)
chhan@yna.co.kr
한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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