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CC·기판·변압기·테스트소켓까지 장기계약
제품 주문 넘어 미래 생산능력 선점…AI가 거래 방식 바꿔
(서울=연합인포맥스) 윤영숙 기자 =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가 급증하면서 기업 간 거래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필요할 때 제품을 주문하고 가격을 협상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수년 뒤 필요한 물량까지 미리 계약해 생산능력을 선점하는 장기공급계약(LTA)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메모리업체에서 두드러진 이른바 '예약매출'은 적층세라믹콘덴서(MLCC)와 반도체 기판, 변압기, 테스트소켓 등 AI 인프라 공급망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출처: 연합뉴스 자료사진]
◇ 삼전·닉스, 생산능력 상당 부분 장기계약으로
17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최근 2분기 실적 발표에서 중장기 생산계획을 기준으로 D램과 낸드 생산능력의 60~70% 범위에서 장기계약을 체결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미 글로벌 5대 데이터센터 고객사와 계약을 완료했으며 AI 수요와 연관된 추가 5개 대형 고객사와도 협상을 마무리하는 단계다. 사실상 거의 모든 고객이 다년 공급계약을 요청하고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SK하이닉스도 최근 실적 발표에서 핵심 고객을 포함한 10여개 고객사와 LTA 협상을 마무리했다고 밝혔다.
글로벌 메모리 3위인 마이크론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마이크론은 기존 LTA보다 계약 구속력을 강화한 '전략적 고객계약(SCA)'을 확대하며 다년간 구매물량과 가격 조건 등을 사전에 약정하고 있다.
과거 메모리업체들이 고객의 수요 전망을 토대로 증설한 뒤 수요가 꺾이면 공급과잉과 가격 급락을 고스란히 떠안았던 것과는 다른 구조다.
최근 LTA는 단순히 계약 기간만 늘린 것도 아니다.
약 5년의 계약기간에 최소 구매물량과 가격 하한 또는 가격밴드, 선수금·예치금 등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구속력을 높이고 있다. 고객이 약정 물량을 가져가지 않더라도 일정 대금을 지급하는 '테이크 오어 페이'(Take-or-Pay) 구조도 활용된다. 삼성전자는 예치금 성격의 선수금을 상당 규모로 계약 조건에 포함했으며 이중 4분의 1을 이미 수취했다고 밝힌 바 있다.
고객의 수요 전망이 실제 구매의무로 바뀌면서 공급자 입장에서는 미래 매출의 가시성이 높아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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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LCC·기판·변압기까지 번지는 '예약매출'
이러한 변화는 메모리에 그치지 않는다.
독립리서치업체 그로쓰리서치에 따르면 최근 LTA를 언급한 기업들은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이외에도 삼성전기와 패키지 기판업체 이비덴, 전력기기업체인 HD현대일렉트릭, 테스트소켓 ISC 등이 있다.
삼성전기는 하이퍼스케일러와 주요 반도체 업체 등 10여개 고객사와 고사양 MLCC LTA를 체결했다.
실리콘 커패시터에서는 글로벌 빅테크와 1조5천억원 규모의 공급계약을 체결했으며, FC-BGA에서도 고객의 투자 지원을 포함한 전략적 장기공급계약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고객이 공급업체의 증설투자를 지원하거나 설비투자비 일부를 부담하고 공급업체가 일정 물량을 보장하는 방식이다. 단순한 제품 구매에서 한발 더 나아가 생산시설 투자 위험까지 고객과 나누는 구조다.
AI 데이터센터 구축에 필수적인 전력기기도 마찬가지다.
HD현대일렉트릭은 최근 글로벌 테크기업과 1조1천억원 규모의 전력·배전 변압기 장기공급계약을 체결했으며 글로벌 빅테크 3곳과 데이터센터용 전력·배전기기 패키지 장기계약을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반도체 테스트소켓 업체 ISC도 글로벌 빅테크와 LTA를 추진하면서 고객 선수금을 기반으로 전용 생산라인을 구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한용희 그로쓰리서치 연구원은 올해 ISC의 LTA 기반 매출 비중이 전체 매출의 절반을 웃돌 것으로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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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품 아닌 'CAPA'를 먼저 사는 AI 시대
산업 전반으로 LTA가 확산하는 배경에는 AI 투자 경쟁과 공급 부족이 자리 잡고 있다.
AI 데이터센터는 GPU나 HBM 하나만 확보한다고 구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메모리와 MLCC, 기판, 전력기기 등 어느 한 부품이라도 부족하면 데이터센터 전체 가동이 늦어질 수 있다.
수조원을 투자하는 빅테크 입장에서는 부품 가격을 조금 낮추는 것보다 필요한 시점에 물량을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 셈이다.
특히 HBM4처럼 고객별 맞춤 제작이 필요한 핵심 부품은 특정 고객의 수요와 공급자의 생산계획이 사실상 일대일로 연결된다. 사전에 물량과 투자계획을 확정해야 할 필요성도 그만큼 커졌다.
공급업체에도 장기계약은 대규모 선행투자의 위험을 낮춰주는 수단이다.
반도체 팹이나 첨단 패키징, 전력기기 생산시설은 수요가 확인된 뒤 즉시 증설할 수 없다. 수년 전에 투자 결정을 내려야 하는 만큼 고객의 구매약정을 확보하면 수요가 예상에 미치지 못할 때 발생하는 유휴설비와 감가상각 부담을 고객과 일부 나눌 수 있다.
고선영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삼성전기의 최근 LTA 움직임과 관련해 "고객사 입장에서 LTA는 중장기 공급 안정성을 확보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공급사 입장에서는 가동률 안정과 수익성 예측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높아지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해석했다.
다만 LTA 물량을 조선이나 전력기기의 수주잔고처럼 회계상 확정 매출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실제 매출은 향후 제품 공급과 가격 확정 등을 거쳐 인식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약매출'은 이미 매출이 발생했다는 의미라기보다 미래 생산능력의 상당 부분을 고객의 구매약정으로 미리 확보했다는 의미에 가깝다.
AI가 산업계에 가져온 변화도 여기에 있다.
기업 간 거래의 중심이 필요한 제품을 그때그때 주문하는 방식에서 미래 생산능력을 미리 확보하는 방식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출처: 연합뉴스 자료사진]
ysyoon@yna.co.kr
윤영숙
ysyo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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