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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A시대②] 천연가스에서 배터리까지…역사로 본 메모리 LTA 명암

2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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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 상·하한에 갇힌 '제한된 안정성'…호황기엔 투자 안전판

천연가스·배터리는 불황에 계약 재조정…사이클 자체는 못 없애

(서울=연합인포맥스) 윤영숙 기자 =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장기공급계약(LTA)을 확대하면서 메모리 산업의 고질적인 실적 변동성이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수년간 공급할 물량을 미리 정하고 가격 하한과 구매의무까지 두면 공급업체는 다운사이클에서도 일정 수준의 매출과 가동률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LTA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장기계약이 산업의 사이클 자체를 없앤 사례는 찾기 어렵다.

17일 독립 리서치업체 그로쓰리서치 보고서에 따르면 천연가스와 정보기술(IT) 부품, 배터리 등 대규모 선행투자가 필요한 산업에서는 수십 년 전부터 LTA가 활용됐지만 수요가 예상과 달라질 경우 계약을 수정하거나 해지하는 일이 반복됐다.

[출처: 연합뉴스 자료사진]

◇ 가격 떨어지면 방어막, 오르면 상승폭 제한

최근 메모리 시장에서도 LTA의 양면성이 나타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미국 주요 클라우드서비스사업자(CSP)들이 다년간 LTA를 체결하면서 이들 고객에 대한 메모리업체의 추가 가격 인상 폭이 제한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올해 초 공급 부족과 고객들의 물량 확보 경쟁으로 서버 D램 가격이 큰 폭으로 뛰었지만, 이미 장기계약을 체결한 고객은 계약에 설정된 가격 조건의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LTA가 가격 하락기에는 공급자를 보호하지만 가격 급등기에는 고객을 보호하는 장치로 작동할 수 있는 셈이다.

최근 메모리 LTA 역시 계약기간 전체의 가격을 고정하기보다 상·하한 범위 안에서 시장가격 변화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설계되고 있다.

마이크론은 가격 상한과 하한을 둔 밴드 안에서 분기별로 가격을 재협상하고 신제품에는 별도의 프리미엄을 적용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범용제품을 대상으로 가격 하한을 설정한다고 밝혔으며 SK하이닉스는 가격 변동성에 대응할 수 있도록 계약을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LTA가 제공하는 것은 가격의 고정이라기보다 가격과 실적의 진폭을 일정 범위 안으로 줄이는 '제한된 안정성'에 가깝다.

이란 남부 파르스 가스전 정제시설

[출처: 연합뉴스 자료사진]

◇ 'Take-or-Pay'도 못 버틴 1980년대 천연가스

장기계약의 한계가 극명하게 나타난 역사적 사례는 1980년대 미국 천연가스 시장이다.

그로쓰리서치에 따르면 1980년대 파이프라인 업체들은 천연가스 생산업체와 장기 '테이크 오어 페이'(Take-or-Pay) 계약을 체결했다.

가스를 실제로 가져가지 않더라도 일정 물량에 대한 대금을 지급하도록 해 생산자는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하고 파이프라인 업체는 장기적인 공급물량을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뒷받침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메모리 LTA와 유사한 구조다.

그러나 에너지 수요가 둔화하고 연료 전환과 대체 공급이 늘면서 천연가스 시장이 공급과잉에 빠지자 상황이 역전됐다.

파이프라인 업체들은 시장에서 소비할 수 없는 물량에 대해서도 대금을 지급해야 했고 대규모 채무와 계약 분쟁이 발생했다.

결국 강력한 구매의무에도 기존 계약은 원래 조건대로 유지되지 못했다. 계약 매입과 지급의무 축소, 비용 분담 등을 통해 대규모 재조정이 이뤄졌다.

최종 수요가 사라지면 계약만으로 산업의 공급과잉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다.

과거 주요 LTA 사례 정리

[출처: 그로쓰리서치 보고서]

◇ 배터리도 캐즘 오자 계약 수정·해지

배터리 산업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반복됐다.

테슬라와 파나소닉은 2010년대 초반부터 장기 공급계약을 통해 배터리셀 공급물량을 사전에 확보했다.

테슬라가 부지와 건물, 인프라를 제공하고 파나소닉이 배터리셀 생산설비에 투자하는 기가팩토리 협력으로까지 관계가 확대됐다.

미래 수요를 기반으로 고객과 공급자가 대규모 설비투자의 위험을 분담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AI 메모리 계약과 닮은 구조다.

그러나 실제 차량 생산량과 배터리 폼팩터, 증설 속도가 달라지면서 공급 조건도 여러 차례 조정됐다.

전기차 수요가 둔화한 이후에는 계약 자체가 사라지는 사례도 나왔다.

LG에너지솔루션이 포드와 맺었던 75기가와트시(GWh), 약 9조6천억원 규모 계약은 공급 개시 전에 종료됐으며 프로이덴베르크와의 19GWh 규모 계약도 고객의 배터리 사업 철수로 해지됐다.

고객의 사업이 축소되거나 생산량이 줄어들 경우 공급업체가 계약대로 모든 물량을 사도록 끝까지 강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장기적인 고객 관계와 향후 수주를 고려하면 소송보다 물량 이월이나 가격 조정, 계약기간 연장 등의 재협상을 선택할 유인이 크다.

SK하이닉스의 HBM4 16단 내부 구졸르 보여주는 모형 전시물

[출처: 연합뉴스 자료사진]

◇ 메모리 LTA도 '사이클 종말' 아닌 완충장치

현재의 메모리 LTA는 과거 계약보다 구속력이 강해졌다.

가격 하한과 구매의무에 선수금·예치금까지 결합하면서 과거 분기 단위 계약보다 가격과 물량의 가시성을 높였다.

AI 투자가 계속 확대되는 동안에는 메모리업체들의 가동률을 안정시키고 가격 급락을 막는 강력한 안전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AI 투자가 예상보다 둔화하거나 고객사의 투자계획이 바뀐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LTA가 가격 하락과 가동률 하락의 충격을 완화할 수는 있어도 최종 수요 감소와 공급과잉 자체를 제거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한용희 그로쓰리서치 연구원은 LTA를 사이클의 소멸로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과거 여러 산업의 사례에서 업황이 급변하면 LTA 자체가 재조정됐기 때문이다.

천연가스에서 배터리까지 이어진 역사가 남긴 결론도 같다.

장기계약은 호황기에 미래 매출을 확보하고 대규모 투자의 위험을 고객과 나누는 안전판이지만 시장이 급격히 꺾이면 계약 역시 시장 상황에 맞춰 움직인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LTA 확대가 메모리 산업의 실적 변동성을 낮출 중요한 변화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를 수십 년간 이어진 메모리 사이클의 종말로 해석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ysyoon@yna.co.kr

윤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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