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열심히 일하면 조금은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은 자본주의의 오래된 약속이다. 월급으로 집을 구하고, 밥을 먹고, 아이를 키우고, 조금씩 모아 미래를 준비한다. 반드시 부자가 된다는 약속은 아니다. 적어도 평범한 삶은 꾸릴 수 있다는 희망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미국에서 이 약속이 정치의 쟁점이 됐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공화당과 민주당이 동시에 집세와 식료품, 의료비와 전기료를 말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첫날 '생활비 위기(cost-of-living crisis)'를 선언했다. 민주당은 주거·의료·에너지·돌봄·식료품을 묶은 '어포더빌리티 아젠다(Affordability Agenda)'를 내놨다. 거창해 보이지만 뜻은 단순하다. 월급으로 보통의 삶을 살 수 있느냐는 문제다.
미국이 가난해진 것은 아니다. 경제는 성장했고 증시는 최고치를 경신했다. 인플레이션도 둔화했다. 문제는 나라가 부유해지는 동안 개인의 삶도 비싸졌다는 데 있다. 물가상승률이 낮아졌다고 가격이 되돌아가진 않는다. 월세와 식료품, 보육비도 마찬가지다. 인플레이션이 가격의 속도라면, 어포더빌리티는 가격과 소득 사이의 거리다. 바이든의 인플레이션을 공격해 백악관으로 돌아온 트럼프에게도 같은 질문이 돌아왔다. 물가는 잡힌다는데 왜 내 월급으로 살 수 있는 삶은 더 작아졌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 앞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경계도 흐려진다. 트럼프는 공급과 규제 완화를 앞세운다. 집을 더 짓고 에너지 생산을 늘리겠다고 한다. 민주당은 의료·돌봄 지원과 경쟁 촉진에 무게를 두면서도 주택에서만큼은 공급 확대와 인허가 개혁을 말한다. 결국 처방은 달라도 성적표는 같다. 현금을 얼마나 뿌렸는지, 세금을 얼마나 깎았는지가 아니다. 월급에서 피할 수 없이 빠져나가는 돈을 얼마나 줄였느냐다. 필수적인 삶의 가격이 소득보다 빨리 오르면 경제가 성장해도 개인은 가난해진다.
한국에도 낯선 얘기가 아니다.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취임하며 내놓은 'ABC 플랜'의 첫 번째 'A'가 어포더빌리티다. 설명은 '먹고사는 민생과 생활비 정치'다. 공교롭게도 이재명 정부는 같은 시기 '대체불가 대한민국'을 내세웠다.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과 방산을 세계에 팔고 더 높은 성장률과 코스피를 목표로 한다. 그런데 시선을 국가에서 개인으로 옮기면 풍경이 달라진다. 서울의 청년은 월세와 식비, 교통비를 내고 얼마를 저축할 수 있는가. 맞벌이 부부는 대출과 교육비를 내면서 아이를 더 낳을 수 있는가. 특히 집값은 주거비를 넘어 결혼과 출산, 교육과 노후까지 결정한다. 나라의 몸집은 커졌는데 개인이 살 수 있는 삶은 그만큼 커지지 않았다. '대체불가 대한민국'과 '감당 가능한 대한민국' 사이의 간극이다.
그래서 생활비 정치는 또 하나의 '민생 패키지'여서는 안 된다. 지원금도, 지역화폐도, 통신비 인하도, 세금 감면도 이미 모두 민생이다. 어포더빌리티가 달라지려면 돈을 더 쥐여주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삶을 비싸게 만드는 구조를 건드려야 한다. 집이 부족하면 공급하고, 경쟁이 부족하면 경쟁시켜야 한다. 가격만 높이는 규제는 걷어내고 시장이 감당하지 못하는 의료와 돌봄에는 재정을 써야 한다. 수단보다는 결과다. 집을 사는 데 몇 년이 걸리는지, 월급에서 주거비가 얼마를 가져가는지, 아이를 낳으면 가처분소득이 얼마나 줄어드는지가 정책의 성적표여야 한다. 생활비에는 이념이 없다. 비싸면 비싼 것이다.
성장은 여전히 필요하다. 하지만 성장의 과실이 평범한 삶의 여유로 자동 환전되지는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미국 정치가 다시 장바구니와 월세로 돌아온 이유다. 한국도 같은 질문 앞에 섰다. 수출과 주가, 세계적인 기업의 숫자만으로 국민에게 잘살게 됐다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어쩌면 어포더빌리티는 성장의 실패가 아니라 잘사는 나라가 그다음에 치러야 하는 시험이다. 국가의 부를 개인의 삶으로 바꿔내는 일이다. '대체불가 대한민국'이라면 '감당 가능한 대한민국'이어야 한다. 열심히 일해도 살 수 있는 삶이 줄어드는 순간, 생활비는 정치가 된다. (경제부 정치팀 차장)
(서울=연합뉴스) 배재만 기자 =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대표가 18일 국회에서 취임 인사차 방문한 강훈식 대통령비서실 비서실장을 만나 이재명 대통령의 축하 난을 받고 있다. 2026.8.18 scoo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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