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변명섭의 소비통] 차석용이 남긴 청구서

26.08.26.
읽는시간 0

LG생활건강 서울역본사 전경

[출처: LG생활건강]

(서울=연합인포맥스) 인수합병(M&A)에는 시차가 있다. 사들이는 결정은 그해 성과로 잡히고, 잘못 산 대가는 몇 년 뒤 다른 사람의 손익계산서에 적힌다.

차석용 전 LG생활건강 대표이사 부회장이 18년간 만든 목록을 지금 후임자들이 한 줄씩 지우고 있다.

LG생활건강[051900]이 미국 에이본 북미 사업을 600만달러, 우리 돈 84억원에 넘긴다. 2019년에 1천450억원에 사들인 회사다. 30여 건의 M&A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대형 건이다.

기업들의 사업보고서에는 다른 회사를 얼마에 샀는지와 지금 장부에 얼마로 남았는지가 나란히 적힌다. 회사가 스스로 매긴 성적표이기도 하다.

2007년 3천136억원에 산 코카콜라음료는 지난해 매출 1조5천966억원, 영업이익 1천176억원을 냈다. 2011년 편입한 해태htb는 최초 취득 금액 칸이 아예 비어 있다. 부채를 떠안는 조건으로 사실상 인수 비용을 치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회사 장부가액이 지금은 2천242억원이다.

에이본의 경우 사들인 첫해 결산부터 자본잠식이었다. 2019년 말 자본총계가 마이너스(-) 554억원이다. 매출은 2020년 3천942억원을 정점으로 5년간 32% 줄었고 누적 순손실이 1천286억원 쌓였다.

이후 별도 기준으로 2022년에 미국 지주사 장부가액에서 2천264억원을 털었고, 2023년엔 캐나다 법인 374억원을 전액 지웠다. 연결 기준으로는 2024년 996억원을 더 인식했다. 그런데 2025년 결산에선 손상검사 대상에서 빠졌다. 사용 가치가 장부금액을 넘는다고 봤다. 그리고 8개월 뒤 84억원에 판다고 공시했다.

에이본만이 아니다. 2021년에 1천164억원에 산 미국 보인카는 3년에 걸쳐 1천514억원을 털었고, 2022년 1천524억원에 지분 65%를 사들인 더크렘샵은 누적 손상액이 매입가를 넘어섰다.

LG생활건강의 이런 딜에는 일정한 흐름이 보인다.

국내 딜은 부실하되 영업 기반이 살아 있는 회사를 싸게 사서 유통·물류망에 얹는 방식이다. 시너지의 원천이 회사 안에 있었다. 에이본은 방문판매원 네트워크에 얹힌 사업이었고, 그 채널은 이미 저물고 있었다. 서울 본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금 투입뿐이었다.

긍정적인 점도 있다. 지금 털어낸 것이 그나마 천만다행이라는 평가다. 증권가의 시선이 과거보다는 지금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한화투자증권은 매각가가 인수가의 5% 수준이어서 인수자산의 가치 훼손을 확인하는 거래임은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더 중요한 것은 LG생활건강이 에이본을 북미 성장의 핵심 자산으로 더는 필요로 하지 않게 됐다는 점이라고 평가했다. 2분기 북미에서 자체 브랜드 매출 비중이 50%까지 올라왔고 관세 환급 효과를 빼도 북미 사업이 흑자로 돌아섰다는 근거를 들었다.

LS증권도 연간 매출은 2천600억원가량 줄겠지만, 에이본의 영업이익 기여도가 크지 않았던 만큼 연결 이익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며, 매출 감소보다 저수익 사업 정리에 따른 질적 개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두 곳 모두 매수 의견을 유지했다.

에이본 실적은 오는 9월부터 연결실적에서 빠진다. 처분 손익은 3분기에 반영될 전망이지만 규모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지금 북미 실적을 끌어올리는 브랜드는 북미에서 사들인 회사가 아니다.

올 1분기 북미 매출은 1천807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33.9% 늘었다. 닥터그루트와 빌리프, CNP가 만든 숫자다. 대표이사는 2023년 3월 이정애, 2025년 11월 이선주로 두 차례 바뀌었다. 에이본을 넘겼고 해태htb는 매물로 나가 있다. 차석용 전 부회장이 사들인 회사를 되파는 일이 지금 경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파는 결정이 옳다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다만 살 때도 그 결정은 옳아 보였다. 그때의 확신 역시 착시일 수 있다.

M&A로 매출을 8배 키운 기록은 지워지지 않지만, 청구서는 늘 뒤늦게 온다는 것이 모든 기업의 숙명이다.

지금 유통·소비재 기업들이 앞다퉈 해외 브랜드를 사들이고 있다. 그 청구서가 크든 작든 언제, 누구 앞으로 도착할지는 알 수 없다. (산업부 차장)

msbyun@yna.co.kr

변명섭

변명섭

함께 보면 도움이 되는
뉴스를 추천해요

금융용어사전

KB금융그룹의 로고와 KB Think 글자가 함께 기재되어 있습니다. KB Think

금융용어사전

KB금융그룹의 로고입니다. KB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KB Think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