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자산 논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질문이 있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이른바 'CBDC'가 나오면 스테이블코인은 필요 없어지는가. 스테이블코인이 확산하면 은행예금은 약화되는가. 토큰화 예금이 스테이블코인을 대체하게 되는가. 이처럼 질문의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그 밑바탕에는 하나의 전제가 깔려 있다. 결국 누군가 하나가 이기고, 나머지는 사라질 것이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앞으로 디지털머니 질서는 단일한 승자경쟁으로 흘러가기보다
[김선영 제작] 일러스트
역할 분담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모든 거래가 같은 성격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금융기관 간 대규모 결제와 개인의 소액결제는 요구되는 신뢰 수준이 다르다. 기업 간 조건부지급과 글로벌 플랫폼 정산도 필요한 기능이 다르다. 자본시장 결제와 AI 에이전트의 자동화 결제를 하나의 화폐 형태로 모두 처리한다는 접근은 현실적이지 않다.
앞으로 중요한 질문은 "CBDC냐, 토큰화 예금이냐, 스테이블코인이냐"가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어떤 거래에 어떤 디지털머니가 가장 적합한가"이다.
먼저 도매 CBDC는 금융시스템의 최종 정산 앵커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 모든 국민이 일상 결제에서 직접 쓰는 돈이라기보다, 금융기관 간 대형 결제나 토큰화 증권·국채 결제, 금융시장 인프라의 최종 정산에서 중앙은행 화폐의 신뢰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스위스중앙은행의 헬베티아 프로젝트 3단계에서는 참여 은행들이 스위스프랑 도매 CBDC를 활용해 스위스 증권거래소(SIX) 산하의 디지털거래소에서 토큰화 채권 거래를 결제했다. 도매 CBDC의 강점은 범용 결제 앱이 되는 데 있지 않다. 토큰화 자본시장에서 "최종적으로 정산됐다"는 가장 높은 수준의 신뢰를 제공하는 데 있다.
토큰화 예금은 다른 역할을 맡는다. 은행예금의 신뢰를 유지하면서, 디지털 원장 위에서 조건부 지급이나 실시간 정산을 가능하게 하는 중간 지대다. 예컨대 대기업이 여러 국가에 흩어진 계열사 자금을 관리한다고 생각해보자. 지금은 시차, 은행 영업시간, 내부 승인 절차, 결제망 차이 때문에 자금 이동과 유동성 관리가 복잡해질 수 있다. 그런데 은행예금이 토큰화되어 24시간 이전되고, 거래조건과 함께 실행될 수 있다면 기업 재무관리 방식이 달라진다. JP모건의 JPM Coin 또는 JPMD 사례가 이 방향을 보여준다. JP모건은 기관고객을 대상으로 예금 기반 토큰을 통해 24시간에 가까운 결제와 실시간 유동성 관리를 지원한다고 한다. 이 경우 토큰화 예금은 스테이블코인의 단순 대항마가 아니라 은행예금의 신뢰를 디지털 실행성으로 확장하는 수단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또 다른 영역에서 유용하다. 핵심은 개방성이다. 글로벌 송금, 플랫폼 정산, 크로스보더 커머스, Web3와 실물경제의 연결처럼 여러 네트워크가 빠르게 연결돼야 하는 영역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의 장점이 커질 수 있다. 비자의 USDC 정산 실험이 좋은 사례다. 비자는 이더리움과 솔라나 네트워크를 활용해 파트너 간 수백만 달러 규모의 USDC를 이동시켜 결제 정산에 성공했다고 한다. 이는 스테이블코인이 글로벌 결제망의 후선 정산을 더 유연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쓰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세 가지 디지털머니는 서로 다른 장단점을 가진다. CBDC는 신뢰 수준이 가장 높지만 개방성은 제한적일 수 있다. 토큰화 예금은 은행 신뢰와 디지털 실행성을 함께 갖지만 은행 간 상호운용성이 중요하다. 스테이블코인은 개방성과 확장성이 뛰어나지만, 준비자산과 상환 안정성, 규제준수 체계가 관건이다.
따라서 미래의 화폐 인프라는 하나의 도로만 있는 구조가 아닐 것이다. 대형 금융기관 결제에는 가장 안전한 정산 레일이 필요하다. 기업거래에는 조건과 회계, 유동성 관리가 결합한 실행형 결제 레일이 필요하다. 글로벌 플랫폼 거래에는 개방형 결제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도로의 종류가 다르듯, 돈의 형태도 거래의 성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무엇이 무엇을 대체할 것인가"가 아니다. "어떤 거래에 어떤 신뢰 인프라를 제공할 것인가"이다. CBDC, 토큰화 예금, 스테이블코인은 서로를 지워야 할 경쟁자가 아니다. 각기 다른 금융기능을 맡을 수 있는 세 개의 층이다. 이 층들이 안전하게 연결될 때 디지털머니는 투자자산 논의를 넘어서 금융 인프라의 다음 단계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손병두 토스인사이트 대표)
장순환
shj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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