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정지서 기자 = 정부가 추진하는 미래대응기금이 재정 운용의 속도를 높이는 대신 국회의 사전 통제는 상대적으로 느슨하게 만드는 새로운 재정 실험으로 떠오르고 있다.
반도체 호황 등으로 늘어난 세수를 미래대응기금에 적립하고, 인공지능(AI) 등 미래 투자에 긴급한 재정 수요가 생기면 추가경정예산을 다시 편성하지 않고 기금운용계획 변경으로 대응하는 게 핵심이다.
정부 입장에서는 급변하는 산업 환경에 맞춰 돈을 제때 쓸 수 있는 '재정 기동성'을 확보하는 셈이다. 반면 국회 입장에서는 본예산과 추경을 통해 사전에 심의해온 재정 지출 가운데 일부가 행정부의 연중 재량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다.
특히 정부안에는 미래대응기금 주요항목 지출금액을 최대 30% 범위에서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쟁점은 30%라는 숫자 자체보다 이 변경권이 적용되는 '주요항목'을 얼마나 넓게 설정하느냐다.
같은 30%라도 GPU 구매처럼 세부 사업 단위에 적용되는 것과 AI·첨단산업 투자처럼 포괄적인 항목에 적용되는 것은 정부가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재정 규모에서 큰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GPU 비싸져도 추경 대신 기금변경…정부가 원하는 '속도'
청와대 관계자는 지난 26일 기자들과 만나 미래대응기금의 필요성을 설명하며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대표 사례로 들었다.
정부가 최신 GPU 구매 예산을 편성했지만 실제 집행 시점에 가격이 급등해 당초 확보하려던 물량을 살 수 없게 됐다고 가정할 경우, 이를 위해 별도 추경을 편성하기보다는 기금운용계획을 변경하는 편이 효율적이라는 설명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그것 때문에 추경을 하기보다는 기금운용계획 변경을 통해 대응할 수 있다면 훨씬 효율적일 수 있다"며 "그런 식으로 긴급한 수요가 생기는 경우 정부가 사업을 집행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은 대응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미래대응기금의 장점을 정부가 '속도'에서 찾고 있다는 의미다.
통상 본예산은 전년도에 편성된다. AI와 반도체처럼 기술 발전과 가격 변화가 빠른 분야에서는 예산 편성 시점과 실제 집행 시점 사이의 간극 자체가 투자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
추경은 정부가 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한 뒤 국회의 심의·의결을 다시 거쳐야 한다. 반면 기금은 최초 운용계획에 대해서는 국회 심사를 받더라도 연중 일정 범위의 지출 변경은 정부가 자체적으로 할 수 있다.
정부는 이런 특성을 활용해 미래투자의 속도를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미래대응기금과 관련해 "일단 정부는 30%의 편성 변경 재량을 두고 있다"면서도 "없는 새로운 사업을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지금 예산에 들어가 있는 미래대응기금 사업 범위 내에서 30%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정부안의 30% 변경 한도는 이미 법안에 담겼다. 실제 재정 통제의 강도는 이 변경권이 적용되는 주요항목의 범위와 세부 사업 구조가 어떻게 짜이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30%보다 중요한 '그릇의 크기'
미래대응기금은 기존의 개별 사업성 기금과는 규모와 사업 범위에서 차이가 크다.
정부는 미래대응기금을 초과세수와 이른바 '추가세수'를 담는 플랫폼으로 설계하고 있다. 여기서 추가세수는 최근 10년간 내국세 평균 증가율을 토대로 산출한 추세치를 실제 세입 전망이 웃도는 부분을 뜻한다. 정부는 이 추가세수와 초과세수를 미래대응기금 재원으로 활용하는 구조를 마련했다.
즉 단순히 예산보다 더 걷힌 세금만 기금에 넣는 구조는 아니다. 장기 세수 증가 추세를 웃도는 부분까지 별도로 떼어 미래투자와 재정안정화 재원으로 활용하겠다는 구상이다.
사용처 역시 지방주도 성장과 미래 성장동력, 청년, 교육·인재 등 4개 계정으로 폭넓다.
정부는 미래대응기금을 영속적인 기금으로 보지 않고 향후 3~4년 안에 효과를 낼 수 있는 사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겠다는 입장이다. 복지처럼 한번 시작하면 계속 재정이 들어가는 사업은 일반회계에 두고, 단기간 집중 투자가 필요한 사업을 미래대응기금에 담겠다는 구상이다.
문제는 이 넓은 사업 범위와 30% 변경권이 결합할 때다.
예컨대 국회가 'AI 산업 육성'이라는 큰 항목을 승인하고 그 안에 GPU 구매, 데이터센터 구축, 전력 인프라와 인재 양성 등을 폭넓게 담아둔다면 정부는 해당 항목 안에서 상당한 수준의 지출 조정이 가능해질 수 있다.
반대로 주요항목을 세부 사업별로 촘촘하게 나누면 국회의 통제력은 커지지만 미래대응기금을 도입한 핵심 명분인 신속한 집행은 약해진다.
결국 30%라는 비율보다 '무엇의 30%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법안에는 4개 사업 분야 외에도 '그 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업'을 포함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에 대해 "대통령령으로 정한다고 하더라도 기금의 일반적인 특성을 법적으로 벗어날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럼에도 대통령령으로 추가할 수 있는 사업의 범위와 기금운용계획상 주요항목의 크기가 어떻게 설정되느냐에 따라 행정부가 실제 확보하는 재정 재량은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시장에서도 미래대응기금의 총규모뿐 아니라 실제 기금운용계획의 세부 항목과 계정별 사업 구조가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연초 예산안을 기준으로 정부의 지출과 국고채 발행 규모를 전망해온 채권시장 입장에서는 연중 기금운용계획 변경 폭이 커질수록 실제 재정 집행과 자금 수요를 예측하기가 어려워질 가능성도 있다.
◇'상시 추경' 비판 막을 장치는 결국 세부 설계
정부는 미래대응기금이 국회를 우회하는 '쌈짓돈'이나 '상시 추경'이라는 비판에는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
미래대응기금 역시 매년 국회가 운용계획을 심사하며 기존에 편성되지 않은 사업을 30% 변경권을 이용해 새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과거 세수결손을 메우기 위해 다른 기금의 여유재원을 활용했던 방식과도 다르다고 강조한다.
청와대 관계자는 당시 방식에 대해 "'크리에이티브 어카운팅', 꼼수 회계 같은 방식으로 하지 않을 것"이라며 기금에 돈이 있다고 해서 다른 사업으로 자유롭게 전출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니라고 말했다.
반대로 미래대응기금에는 애초부터 재정 안정화 기능을 제도적으로 넣었다.
세수가 많이 걷힐 때는 기금에 쌓아두고 이후 세수결손이 발생하면 기금에서 일반회계로 전출해 지출 감소나 추가 국채 발행을 막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2021~2022년 약 100조원의 초과세수가 발생한 뒤 2023~2025년에는 100조원을 넘는 세수결손이 이어졌다는 점을 문제로 보고 있다.
세수가 많이 들어오면 한꺼번에 쓰고, 부족하면 지출을 줄이거나 국채를 늘리는 방식에서 벗어나겠다는 게 미래대응기금의 또 다른 목적이다.
결국 미래대응기금은 재정의 기동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높이는 대신 행정부의 재량도 함께 키우는 제도다.
정부가 빠른 미래투자를 위해 확보한 30% 변경권이 실제로 어느 정도의 권한이 될지는 주요항목의 세분화 정도와 대통령령 위임 범위, 국회 보고·통제 절차에 달려 있다.
한 여권 관계자는 "미래대응기금이 정부가 강조하는 '빠른 재정'으로 자리 잡을지, 국회의 사전 심의를 약화한 '상시 추경'이라는 비판에 직면할지는 결국 30%라는 숫자가 아닌 그 30%가 적용되는 그릇을 어디까지 쓸 지가 될 것"이라며 "정부와 재정당국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니 실제 사례를 좀 지켜보자"고 귀띔했다.
jsjeong@yna.co.kr
정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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