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정지서 기자 = 정부가 미래대응기금을 통해 세수와 재정지출, 국채 발행이 한 방향으로 함께 출렁이는 기존 재정운용 공식을 바꾸겠다는 구상을 구체화하고 있다.
반도체 호황으로 세수가 예상보다 크게 늘더라도 이를 곧바로 지출 확대나 국채 발행 축소에 모두 쓰지 않고 일부를 기금에 적립해 두고, 반대로 세수결손이 발생하면 쌓아둔 재원을 일반회계로 돌려 지출 급감이나 국채 급증을 막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국내 재정은 세수가 많이 들어올 때는 씀씀이가 커지고, 세수가 부족할 때는 불용과 국채 발행 확대가 뒤따르는 경향이 강했다. 미래대응기금은 이 같은 경기순응적 재정운용을 완화해 세수 사이클과 재정정책 사이에 하나의 완충지대를 만드는 시도에 가깝다.
청와대 관계자는 지난 26일 기자들과 만나 "세금이 많이 들어올 때는 많이 들어온다고 많이 쓰고, 적게 들어오면 적게 들어온다고 또 안 쓰는 게 정부의 책임 있는 재정운영이 아니었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부가 문제로 보는 것은 최근 몇 년간 세수의 방향보다 진폭이다.
2021~2022년에는 초과세수가 합쳐 약 100조원에 달했지만, 2023~2025년에는 반대로 누적 세수결손이 100조원을 웃돌았다. 몇 년 사이 200조원에 가까운 세수 스윙이 발생한 셈이다.
이처럼 세수 전망 오차가 커지면 재정정책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초과세수가 발생한 해에는 추경이나 국채 발행 축소를 통해 재정을 풀 여력이 커지고, 반대로 결손이 발생하면 집행을 줄이거나 추가 국채 발행에 의존해야 한다.
특히 경기가 나빠져 세수가 줄어드는 시기에 정부까지 지출을 줄이면 경기 하강을 더 키울 수 있다. 정부가 지난 2023~2024년 대규모 세수결손 당시 불용을 통해 지출을 줄였던 방식을 문제 삼는 이유다.
◇세수 '추세선' 만든다…호황기 재원 일부는 미래로
미래대응기금은 이런 변동성을 연도 간에 나누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정부는 최근 10년간 내국세 평균 증가율을 토대로 장기적인 세수 추세를 계산하고, 실제 세입 전망이 이 추세를 웃도는 부분을 이른바 '추가세수'로 본다. 여기에 당초 예산보다 실제 세입이 더 늘어난 초과세수도 기금 재원으로 활용하는 구조다.
중요한 것은 추가로 들어온 돈을 모두 당해연도 재정에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도체 업황이 좋아 법인세가 급증하더라도 이를 일회성 호황의 결과로 판단하면 일부를 기금에 적립해 다음 경기 하강기에 대비한다. 사실상 정부가 세수에도 '평균값'을 만들어 쓰겠다는 접근이다.
반대 방향에서도 기금은 작동한다.
청와대 관계자는 "많이 들어올 때 조금 쌓아놨다가 적게 들어오거나 부족하면 그걸 통해서 추경이나 추가 국채 발행을 하지 않고 미래대응기금에서 일반회계로 전출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고 설명했다.
미래대응기금이 미래 성장산업에 투자하는 사업기금이면서 동시에 '재정안정화기금'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갖는 이유다.
결국 새 제도가 정착되면 세수가 많이 걷혔다고 정부 지출이 같은 폭으로 늘어나지 않고, 세수가 덜 걷혔다고 같은 폭으로 줄지도 않는 구조가 된다.
이는 재정의 기준을 '올해 세금이 얼마나 걷혔나'에서 '경기 사이클 전체에서 얼마를 쓸 수 있나'로 바꾸는 것으로 풀이된다.
◇국채 발행시장에서 '세수 롤러코스터' 끊는다
이 같은 변화는 국고채 시장에도 직접 영향을 미친다.
기존 구조에서는 세수가 예상보다 많이 들어오면 국채를 덜 발행할 여지가 커지고, 세수결손이 발생하면 반대로 국채 발행 필요성이 늘어난다.
미래대응기금이 중간에 들어오면 이런 연결고리가 약해진다.
세수가 크게 증가한 해에도 국채 발행을 급격히 줄이지 않고 일정 수준을 유지하면서 초과 재원 일부를 기금에 적립할 수 있다. 반대로 세수가 부족한 해에는 기금 재원을 일반회계로 옮겨 국채 발행 증가폭을 낮출 수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내년에 추가 세수가 많이 들어온다고 국채를 거의 발행하지 않고 그 부분을 전부 메우면 후년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며 "한 해는 이렇게 하고 한 해는 저렇게 하는 것이 안정적인 국가채무 관리가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정부가 최근 내년도 국고채 발행량 축소 기대에 거리를 두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국채가 금융시장의 지표금리와 지표채권 역할을 해야 한다며 "갑자기 규모가 줄어버리면 금융시장에서 앵커가 되는 상품이 줄기 때문에 어려움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개인적으로는 국채시장이 좀 더 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국채 시장의 확장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정부가 국가채무의 절대 규모만큼 국채 발행의 예측 가능성과 시장 유동성도 재정운용의 변수로 보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이 경우 미래대응기금은 단순한 재정 저수지를 넘어 국고채 공급의 변동성을 낮추는 장치로도 작동할 수 있다.
◇'경기순응 재정' 끊을까…관건은 적립과 지출의 규칙
다만 이런 구조가 실제 재정 안정으로 이어질지는 결국 기금을 얼마나 일관된 규칙 아래 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세수 추세선이다.
장기 추세를 지나치게 낮게 잡으면 정상적인 세수 증가분까지 '추가세수'로 분류돼 기금에 묶일 수 있다. 반대로 추세를 높게 설정하면 호황기에 충분히 적립하지 못해 불황기에 꺼내 쓸 재원이 부족해질 수 있다.
기금 안에서 미래투자와 재정안정화 재원을 어떻게 나눌지도 중요하다.
정부는 청년과 지방, 미래 성장동력, 교육·인재 등 4개 분야에 향후 3~4년간 집중 투자하면서 나머지 재원은 총괄계정에서 운용할 계획이다.
투자를 과도하게 늘리면 정작 세수 하락기에 사용할 안전판이 얇아질 수 있고, 반대로 지나치게 많은 돈을 적립하면 미래 성장에 투자하기 위해 기금을 만들었다는 취지가 약해진다.
정부가 추가 세수 전부를 국가채무 상환에 쓰는 방안에도 선을 긋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오늘 1만원을 써서 내일 100만원을 만들 수 있다면 미래에 더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곳에 투자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국가채무 상환과 미래투자, 재정안정화 사이에서 재원을 나눠 쓰겠다는 판단이다.
결국 미래대응기금이 바꾸려는 것은 재정의 크기보다 재정을 쓰는 시간표다.
호황기에 생긴 여력을 모두 당겨 쓰지 않고, 불황기에는 세입이 줄었다는 이유만으로 지출을 급격히 줄이지 않는 구조다. 세수와 지출, 국채 발행을 같은 해에 맞추던 방식에서 벗어나 경기 사이클 전체를 놓고 재정을 운용하겠다는 것이다.
미래대응기금이 정부 구상대로 작동한다면 한국 재정은 '세수에 맞춰 쓰는 재정'에서 '세수 변동을 흡수하는 재정'으로 한 단계 이동하게 된다. 반대로 호황기마다 투자 명목으로 적립금을 소진하거나 경기 악화 때마다 정치적 필요에 따라 돈을 꺼내 쓰기 시작한다면 거대한 제2의 일반회계만 남을 수 있다.
전직 재정당국 관계자는 "미래대응기금의 성패는 규모가 아니다"며 "좋을 때 얼마나 남겨두고 나쁠 때 얼마나 꺼낼지에 대한 원칙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느냐, 그리고 정부와 무관하게 연속성을 가질 수 있느냐에 달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jsjeong@yna.co.kr
정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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