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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균의 주주자본주의] 한국에도 '그레이엄과 도드 마을'이 필요하다

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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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펀드매니저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한국 시장에서 투자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물론 기업의 미래를 예측하는 일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투자가 쉬울 수는 없다. 그런데 한국 시장에는 조금 다른 종류의 어려움도 있다. 기업의 사업과 가치를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경영진이나 지배주주와 전체 주주 사이의 이해관계, 자본배분과 기업거버넌스까지 함께 분석해야 한다. 여기에 주가가 펀더멘털과 상당 기간 동떨어져 움직이는 시장의 특성까지 더해진다.

주가가 실적이나 기업가치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수준에서 형성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특정 산업이나 종목이 테마가 되면 실제 가치와 큰 관계없이 관련 기업들의 주가가 함께 급등한다. 투자자들도 기업의 장기적인 경쟁력이나 현금흐름보다 테마와 수급, 단기 주가의 방향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현상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한국 시장의 고질적인 기업거버넌스 문제다. 좋은 실적이 결국 주주가치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부족한 시장에서 투자자에게 무조건 장기투자를 요구할 수도 없다. 회사가 돈을 잘 벌어도 지배주주에게 유리한 합병이나 분할을 하고, 쌓인 현금을 비효율적으로 사용하며, 주주에게 돌아가야 할 경제적 이익이 다른 곳으로 이전될 수 있다면 기업의 장기적인 펀더멘털을 분석하는 것보다 단기적인 주가 움직임을 예측하려는 게 합리적인 행동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기업거버넌스가 나쁘다는 이유로 기업가치에 대한 분석을 포기할 수는 없다. 오히려 반대다. 기업이 창출할 수 있는 이익과 현금흐름, 보유자산과 경쟁력을 분석하고 그 가치보다 충분히 낮은 가격에 투자하는 것이 결국 투자 판단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기업가치와 무관한 가격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데 의존하는 투자는 그것을 장기간 반복하기 어렵다. 반면 기업 펀더멘털이 개선되면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가치의 증가가 주가에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기업 거버넌스까지 개선되어 기존의 할인이 축소된다면 투자자는 기업가치의 증가와 할인율 축소라는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누릴 수 있다.

이런 펀더멘털에 기반한 투자방식이 장기간 반복 가능한 투자법인지는 이미 오랜 기간 검증되어 왔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배울 때 검증된 방법을 찾아보고, 그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의 사고방식을 공부한다. 투자도 다를 이유가 없다.

1984년 워런 버핏은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에서 벤저민 그레이엄과 데이비드 도드의 "증권 분석(Security Analysis)" 출간 50주년을 기념해 유명한 연설을 했다. 이후 '그레이엄과 도드 마을의 위대한 투자자들(The Superinvestors of Graham-and-Doddsville)'이라는 글로 널리 알려졌다.

버핏은 당시 학계에서 영향력이 커지던 효율적 시장가설에 질문을 던졌다. 시장이 충분히 효율적이어서 지속적으로 시장을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오랜 기간 뛰어난 성과를 거둔 투자자들은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일까?

그는 유명한 동전 던지기 비유를 들었다. 만약 2억2천500만명의 미국인이 매일 동전을 던진다면 순전히 우연만으로도 20번 연속 결과를 맞히는 사람이 215명 남게 된다. 따라서 뛰어난 투자성과를 거둔 사람이 몇 명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성과가 운이 아닌 실력에서 비롯됐다고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버핏은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더 던진다. 같은 숫자의 오랑우탄이 동전을 던졌는데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215마리 가운데 40마리가 오마하의 특정 동물원 출신이라면 어떨까. 그때는 그 동물원의 먹이나 훈련방식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투자에서도 마찬가지다. 장기간 시장을 이긴 투자자들이 특정한 '지적 출신지(intellectual origin)'에서 유난히 많이 나왔다면 그것을 단순한 우연이라고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지적인 공동체가 바로 그레이엄과 도드 마을(Graham-and-Doddsville)이다.

버핏은 이를 말로만 주장하지 않았다. 월터 슐로스, 빌 루안, 찰리 멍거 등 그레이엄의 영향을 받은 투자자들이 서로 다른 종목과 방식으로 투자하면서도 장기간 시장수익률을 상회한 실제 투자기록을 제시했다. 월터 슐로스는 100개가 넘는 종목에 분산 투자했고, 찰리 멍거는 훨씬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빌 루안 등 다른 투자자들의 포트폴리오와 투자방식도 서로 달랐다.

이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특정한 종목이나 투자기법이 아니라 사고방식이었다. 이들은 주식을 단순히 가격이 오르내리는 증권이 아니라 실제 기업의 일부로 보았다. 투자할 때 주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업을 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장에서 형성되는 가격(price)과 그 기업의 가치(value)는 서로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버핏의 표현대로 이들이 집중한 두 가지 변수는 가격과 가치였다.

또 하나 중요한 원칙은 '안전 마진(margin of safety)'이다. 1달러의 가치가 있는 것을 40센트에 살 수 있다면 60센트에 사는 것보다 기대수익은 높아지고 손실 위험은 오히려 낮아진다. 버핏은 3만 파운드의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된 다리에 1만 파운드의 트럭만 지나가게 하는 것과 같은 원리가 투자에도 적용된다고 설명했다. 가치평가를 한 치의 오차 없이 맞히려는 것이 아니라 판단이 틀리더라도 손실을 피할 수 있도록 충분한 여유를 두고 투자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원칙이 비밀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버핏은 그레이엄과 도드가 "증권 분석"을 통해 이 방법을 세상에 공개한 지 이미 50년이 지났는데도 가치투자가 확산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사람에게는 쉬운 것을 어렵게 만들려는 묘한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좋은 투자원칙이 공개된 것과 그것이 시장의 투자문화로 자리 잡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리고 투자문화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교육이 중요하다. 바람직한 투자 방식과 문화를 만들려면 양질의 투자 교육이 시장참여자들에게 제공되어야 한다.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에는 지금도 그레이엄과 도드의 전통을 이어가는 '그레이엄과 도드 투자 하일브런 센터(Heilbrunn Center for Graham & Dodd Investing)'가 있다. 학생들은 기업분석과 가치평가뿐 아니라 부실채권 투자, 행동주의 투자 등 실제 투자와 직접 연결되는 다양한 분야를 공부한다. 주식을 기업의 소유권으로 생각하고, 재무제표를 읽고, 기업의 경쟁력을 분석하고, 내재가치를 추정하며,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 가능성까지 고려해 투자하는 사고방식을 훈련한다. 실제로 돈을 운용해 본 투자자들이 자신의 성공뿐 아니라 실패를 학생들과 공유하는 것도 중요한 교육의 일부다.

한국에도 이런 투자 교육이 훨씬 많아져야 한다. 재무이론을 배우는 것과 실제 기업을 분석해서 투자 판단을 내리는 것은 상당히 다른 일이다. 개인투자자에게도 차트나 다음 급등주를 찾는 방법보다 기업의 손익계산서와 재무상태표를 읽고 기업가치를 분석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특히 AI와 유튜브를 통해 누구나 지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대에는 좋은 교육 콘텐츠가 충분히 공급된다면 과거보다 훨씬 많은 개인투자자가 제대로 된 투자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교육과 함께 자산운용업계의 역할도 중요하다. 모든 국민이 직접 기업의 사업보고서를 읽고 기업가치를 계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자본시장이 발전할수록 전문적인 자산운용사를 통한 간접투자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투자자는 신뢰할 수 있는 운용사를 선택하고, 운용사는 고객의 돈을 장기간 책임지고 운용하면서 생산적인 기업에 자본이 배분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산운용사부터 바뀌어야 한다. 시장에서 유행하는 테마를 따라 상품을 만들고 단기간의 수익률 경쟁에 몰두해서는 안 된다. 좋은 자산운용사가 장기간 좋은 성과를 내고, 투자자는 그런 운용사에 오랫동안 자금을 맡기며, 운용사는 다시 좋은 기업에 자본을 공급하는 선순환이 만들어져야 한다. 동시에 운용사는 단순히 주식을 사고파는 데 그치지 않고 주주의 대리인으로서 기업의 잘못된 자본배분과 거버넌스를 감시해야 한다. 기업이 주주가치를 훼손한다면 목소리를 내는 것 역시 고객의 돈을 맡아 운용하는 운용사의 책임이다.

한국 자본시장의 기업거버넌스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법과 제도만 바꾼다고 좋은 자본시장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을 바라보는 투자자의 사고방식과 고객의 돈을 맡아 운용하는 자산운용사의 책임감, 그리고 다음 세대의 투자자를 교육하는 방식까지 함께 변해야 한다.

다음 테마를 남들보다 하루 먼저 찾아내는 투자자만 많아져서는 좋은 자본시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주식 뒤에 기업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가격과 가치를 구분하며, 충분한 안전마진을 두고 기업의 가치에 기반해 자본을 배분하는 투자자들이 많아져야 한다.

한국에도 그런 투자자들이 모여 있는 지적인 마을, 한국 자본시장의 '그레이엄과 도드 마을(Graham-and-Doddsville)'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김형균 차파트너스자산운용 본부장/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부회장)

장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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