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피혜림 기자 = 한국물(Korean Paper) 시장이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지만 시장을 바라보는 당국의 조치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있는 모습이다.
외화채 북빌딩(수요예측) 날짜를 받기 위해 당국과의 소통이 필수적인 상황에서 이를 담당하는 재정경제부의 재량이 큰 실정이다.
명문화된 규정 없이 국내 증권업 인가 카드를 꺼내든 재경부의 한마디에 시장 참여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점도 이런 구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높은 대외 신인도와 누적된 발행 노하우 속에서 한국물 시장은 아시아의 주요 발행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정작 이를 뒷받침해야 할 당국의 제도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SSA 시대까지 왔는데…" 당국 제도는 제자리
17일 연합인포맥스 'KP물 주관순위'(화면번호 4431)에 따르면 지난해 공모 한국물 발행량은 573억2천290만달러로, 연합인포맥스가 집계를 시작한 2016년 이래 최대치를 기록했다.
공모 한국물은 올해도 상반기에만 442억6천450만달러를 찍어내면서 역대 최대 물량을 경신하고 있다.
출처 : 연합인포맥스 '발행만기 통계(KP)'(화면번호 4270)
양적 성장과 더불어 글로벌 시장에서의 입지 또한 나날이 달라지고 있다.
국책은행의 경우 글로벌 시장에서 초우량 기관으로 꼽히는 정부·국제기구·기관(SSA) 발행시장에 진입하면서 보다 높은 안정성을 추구하는 투자자까지 포섭하고 있다.
전 세계 최초의 기업물(corporate) 완탕본드부터 홍콩 정부를 제외한 첫 다중통화 디지털채권까지 글로벌 시장에서의 새로운 시도에도 적극적이다.
한국물은 국가 신용등급 기준 AA급(무디스 기준 'Aa2') 우량 신용도에 힘입어 아시아 안전자산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있다.
기업들의 적극적인 외화채 조달 기류 속에서 투자자들과의 소통을 이어온 점도 신뢰를 높인 요소다.
하지만 한국물 시장을 바라보는 당국의 제도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한국물 시장만의 독특한 특성으로 꼽히는 '윈도우'가 대표적이다.
국내 발행사는 외화채 발행 시 재경부로부터 북빌딩 날짜를 뜻하는 윈도우를 지정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 관련 소통은 물론 서류 제출 등도 필수적인 터라 사실상 재경부를 거치지 않고는 외화채 조달 자체가 불가능하다.
외환위기 후 외화 부채 관리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자리를 잡은 형태로, 최근 윈도우 일정을 기존의 이틀에서 일주일로 늘려주면서 전보다 자율성이 부여되긴 했지만, 여전히 해당 제도 아래 놓여있는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당국의 통제가 강한 중국조차도 발행 한도 정도만 관리하는 수준"이라며 "사실상 발행 시기를 윈도우로 할당하는 건 아시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의 대외 신인도 제고와 커진 시장 규모 등을 고려할 때 시장 여건만 받쳐준다면 하루에만 세 건의 발행물이 소화되는 경우도 심심찮지만, 재경부는 여전히 윈도우 제도를 통한 관리에 집중하고 있는 셈이다.
◇"자본시장 글로벌화 추진한다더니…" 흐름 역행 비판론도
외화채 발행 시 재경부의 권한이 막강하다 보니 시장 참가자들은 이들의 목소리에 보다 민감할 수밖에 없다.
최근 재경부가 달러·유로채 발행 업무 관련 국내 증권업 인가가 없는 역외 금융기관에 달라진 기류를 내비치면서 시장의 혼선이 가중된 점도 이와 무관치 않다.
다만 당국이 국내 증시는 물론 채권·외환시장 선진화에 나서면서 자본시장의 글로벌화를 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한국물만 결이 다른 행보를 보이는 듯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례로 채권시장만 하더라도 정부는 우리나라 국채의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을 계기로 외국인 투자자의 자금 유입 촉진에 앞장서고 있다.
원화채의 세계화를 꾀하는 상황에서 이번 조치로 외화채는 사실상 국내 증권업 인가를 받은 외국계IB 채널을 통해서만 해외 세일즈가 원활해지도록 창구를 제한한 셈이다.
한국물 시장 성장 속에서 국내 발행사들은 기존 아시아와 유럽, 미국의 대표국 기관 투자자와 관계를 다지는 걸 넘어 다양한 국가의 투자시장으로 발을 넓히고 있다.
이에 각국 현지 IB와의 협업 필요성이 커진 상황이지만 증권업 인가의 틀에 갇혀 도리어 시장 성장을 저해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도 제기된다.
업계 관계자는 "물론 국내에 지점을 둔 하우스와 그렇지 않은 곳 간의 형평성도 중요하겠지만 발행사 입장에서는 다양한 시장에서 다양한 금융기관을 통한 금융 자문과 지원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며 "대미 투자 등으로 외화 조달의 중요성이 커진 이 시점에 이러한 조치는 국가 차원에서도 실익이 크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phl@yna.co.kr
피혜림
ph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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