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제안 공개되면 주가에 새 '가격표'…저PBR 기업 경영진 압박
美 이사회 답변·英 떠보기 차단·日 진성제안 선별…韓 보완장치 관건
[이태호 제작] 사진합성·일러스트
(서울=연합인포맥스) 정원 기자 = '한국형 베어허그법'이 현실화하면 국내 인수·합병(M&A) 시장의 무게중심이 대주주와 경영진 간 물밑 협상에서 주주가 참여하는 공개시장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저평가된 상장사에 현재 주가보다 높은 가격의 인수 제안이 들어오면 이사회가 이를 덮어두기 어려워지면서 M&A가 기업가치를 끌어올리는 촉매가 될 수 있어서다.
다만, 일각에선 '진성 제안'을 걸러낼 장치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을 경우 중소형 상장사를 중심으로 주가 변동성과 경영권 불안만 키울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6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오기형 K-자본시장특별위원장이 발의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상장회사에 대한 공개매수가 시작되면 대상회사 이사회가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검토를 거쳐 의견을 표명하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인수 제안 내용과 검토계획, 판단 결과와 이유도 함께 공시하도록 유도한다.
시장 전문가들은 법안이 M&A 시장에 미칠 가장 직접적인 영향으로 '가격 발견' 기능을 꼽고 있다.
예컨대 PBR 0.3배인 기업에 제3자가 0.6배 수준의 인수가격을 제시하면 거래 성사 여부와 별개로 시장에는 새로운 가격 기준이 생긴다.
이사회가 제안을 거절하려면 독립경영을 유지하는 것이 제안가격보다 주주에게 유리한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M&A가 무산돼도 배당 확대나 자사주 매입·소각, 비핵심 자산 매각, 저수익 사업 정리 등 자본배분 정책을 바꾸라는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현금성 자산이나 부동산을 많이 보유하고도 낮은 PBR에 거래되는 기업일수록 영향이 클 수 있다는 평가가 많다.
M&A 전략도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그간 물밑에서 끝날 수 있었던 인수 시도가 시장에 노출되면서 잠재 매수자는 제안가격과 자금조달 능력을 보다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
사모펀드(PEF)와 행동주의 펀드에는 저평가 기업에 인수 프리미엄을 제시해 이사회 대응을 끌어내는 전략이 새로운 투자 수단이 될 수 있는 셈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비슷한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미국은 공개매수가 시작되면 대상회사 이사회가 원칙적으로 10영업일 안에 수용 또는 거부 등의 입장과 이유를 밝히도록 하고 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하는 'Schedule 14D-9'에는 이사회 권고와 거래 관련 이해관계 등의 정보가 담긴다.
한국형 베어허그법과 마찬가지로 인수 제안을 경영진 선에서 묻어두지 못하게 하는 장치다.
다만 실제 공개매수가 개시된 이후 대상회사의 대응을 규율한다는 점에서 단순 인수 제안 단계와 구별된다.
영국은 '떠보기 제안'을 차단하는 장치까지 뒀다.
기업인수 규정인 '테이크오버 코드(Takeover Code)'는 '인수 의사를 확정하거나 철회하라(Put up or shut up)'는 원칙에 따라 잠재 인수자가 공개되면 원칙적으로 28일 안에 확정적인 인수 의사를 밝히거나 철회를 선언하도록 한다.
국내에서 베어허그 공시만 강화되고 인수자 책임은 그대로라면 높은 가격의 제안서를 던져 주가와 이사회 반응을 확인한 뒤 물러나는 전략이 나타날 수 있다.
이 경우 기업가치 발견보다 이벤트 드리븐 매매와 단기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
일본은 '진성 제안'을 가려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2023년 '기업 인수에 관한 행동지침'을 마련해 상장회사 이사회가 진지한 인수 제안을 성실하게 검토하도록 했다.
다만 모든 제안을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고 구체성과 목적의 합리성, 실현 가능성 등을 따져 진정성 있는 인수 제안인지를 판단하도록 했다.
이후 일본 기업 관련 M&A는 2024년과 2025년 모두 건수와 금액이 증가했다. 경제산업성도 지침을 인용해 인수 제안을 검토하는 사례가 늘었다고 평가했다.
다만, 일본의 M&A 증가에는 지배구조 개혁과 도쿄증권거래소의 자본효율 개선 요구, 행동주의 투자 확대 등이 함께 작용한 만큼 이를 지침만의 효과로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도 있다.
시장에서는 한국형 베어허그법이 시행되면 시가총액이 작고 최대주주 지분율이 낮은 상장사부터 영향이 커질 것으로 본다.
상대적으로 적은 자금으로 경영권에 도전할 수 있는 데다 높은 프리미엄의 인수 제안이 공개됐을 때 주가에 미치는 충격도 클 수 있어서다.
여기에 의무공개매수 제도까지 결합되면 M&A의 비용 구조도 달라진다.
경영권 지분뿐 아니라 일반주주 지분까지 사들이는 데 필요한 자금 부담이 커지는 상황에서 인수 제안과 이사회 판단까지 공개되면 사전 자금조달과 밸류에이션의 중요성은 한층 커지는 셈이다.
결국 제도의 파급력은 '공개 범위'와 '진성 제안 판별장치'에서 갈릴 것이란 게 시장 전문가들의 대체적 평가다.
일정 수준의 자금조달 증빙이나 구체적인 인수조건을 갖춘 제안에 공시 의무를 부과하고, 일정기간 내 실제 인수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는 장치가 마련되면 인수 제안의 가격 발견 기능을 살리면서 떠보기 제안은 줄일 수 있다.
반대로 별다른 진입장벽 없이 제안 공개 의무만 강화하면 거래 활성화보다 주가 변동성과 경영권 방어 비용이 먼저 늘어날 가능성이 커진다.
한 사모펀드운용사(PEF) 대표는 "미국과 영국, 일본 역시 인수 제안과 이사회 대응을 투명하게 만드는 대신 인수자의 책임이나 제안의 실현 가능성을 확인하는 장치를 함께 두고 있다"며 "결국 이사회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만큼 실제 거래로 이어질 수 있는 제안인지를 확인하는 규칙이 중요하다"고 전했다.
jwon@yna.co.kr
정원
jw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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