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지금은 LG전자로 불리는 1970년대 금성사의 TV광고 문구다. 부동산 업계로 넘어오면 이 문구는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합니다"로 바뀐다. 지난 1990년 1기 신도시 아파트가 대거 분양하면서 일산과 분당이 양대 선택지로 부상했다. 각자의 이유로 내린 선택은 이후 따라잡을 수 없는 자산 격차를 가져왔고 그야말로 평생을 좌우하게 됐다.
투자의 세계에서는 가정이 필요 없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선택을 곱씹고 미련을 남기기 마련, 이런 행태를 두고 '껄무새'라고 자조한다. '집을 살 걸,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주식을 살 걸' 하는 말에서 '걸'을 가져와 이를 앵무새처럼 반복한다고 해서 만든 말이다. 굳이 이 시점에서 '껄무새'가 되어보려고 하는 것은 '전세는 주거 사다리이고 월세는 임차인의 소득을 갉아 먹는다'는 주택업계의 속설을 검증해보기 위해서다.
[출처: AI생성이미지]
A씨는 2년 전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서울 출퇴근이 가능한 경기 인근 지역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주택 매입은 여의찮아 임차를 선택한 그는 전셋집을 구했다. 민간주택정보업체에 따르면 2024년 4분기 서울 전용 84㎡ 아파트의 평균 전세보증금이 7억3천만원이니 이를 그대로 가져와 본다.
2년 뒤 계약 만료 시점에서 거주하던 아파트가 매각되는 바람에 그는 다시 임대주택을 찾아 나섰다. 전세 가뭄의 여파로 월세 계약을 하게 된 A씨는 만약 2년 전 월세를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계약 만료로 7억3천만원의 보증금을 돌려받지만, 그동안의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원금을 돌려받은 것이 아니다. 물가가 연간 2% 상승했다고 한다면 보증금의 실질구매력은 3천만원가량 줄어든다.
만약 A씨가 월세를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보증금 2억3천만원에 월세 200만원으로 계산을 해보자. 그는 매년 월세로 2천400만원을 지불하는 등 2년간 4천800만원을 지출한다. 그리고 보증금에서 아낀 5억원을 코스피에 투자했다고 해보자. 지난 2024년 12월부터 올해 9월 말까지의 코스피 지수 상승률은 184.98%다. 만약 그가 보증금 5억원을 코스피 지수 상품에 투자했다면 9억2천만원의 평가이익을 거둬 투자자산은 14억2천만원이 된다. 여기에 보증금 2억3천만원을 포함하면 2년간 지출한 월세 4천800만원을 빼더라도 약 16억원이 남는다. 지난달 서울 아파트 중위가격이 13억원이었으니 강남, 서초, 송파 등 집값 상위 5분위에 해당하는 지역을 제외한 서울 어느 곳의 아파트라도 거뜬히 구매할 수 있는 셈이다.
그림설명: 코스피 수익률에 따라 전세의 기회비용은 달라진다. 코스피가 연 6~12% 상승한다고 할 때 월세 대신 전세를 선택한 기회비용은 월세 비용을 제외하고도 최대 8억원 가까이 될 수 있다. [출처: AI생성이미지]
A씨는 '전세가 주거사다리'라는 말을 곱씹었다. 돌려받은 전세보증금의 실질 구매력은 3천만원가량 줄었을 뿐 아니라 주식시장에 투자했다면 얻었을 9억원을 기회비용으로 치렀다. 전세가 주거사다리라는 말은 집값의 상승속도가 소득의 상승속도보다 뒤처졌을 때 성립한다. 집값이 소득보다 빠른 속도로 상승한다면 자산을 보증금으로 묶어두기보다는 집값보다 빨리 성장하는 시장에 배분하는 것이 주거사다리를 놓는 길이다. 그리고 다수의 임차인이 이 점에 눈을 뜨고 있다. 서울 수도권 아파트 시장에서 전세 거래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올해 8월 주택통계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임대차 시장에서 월세 비중이 52.3%로 절반을 넘어섰다. 전세사기가 덮친 비아파트 주택에서는 월세 비중이 지난 2024년부터 60%를 훌쩍 넘어 올해 78.2%에 달하는 상황이지만 전세사기와 거리가 멀었던 아파트 시장에서도 월세가 전세를 추월했다. 서울 아파트 시장은 2025년까지만 하더라도 월세 비중이 44.0%에 그칠 정도로 전세가 우위였다.
여기에는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주목할 부분은 임대인이 아니라 임차인의 선택이 월세 증가를 가져왔을 가능성이다. 비록 국내 증시가 7월 들어 큰 폭의 하락을 겪었다고는 하지만 최근 2년간의 시계를 두고 봤을 때 주가 상승률은 아파트 시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자본시장의 선진화를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세 차례에 걸친 상법 개정은 국내 증시가 지수 3천의 벽을 넘어 단숨에 4천대로 진입하게 하는 도화선이 됐다. 여기에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인공지능(AI) 수혜주들의 선전이 겹치면서 이 대통령이 공약했던 임기 내 코스피 5천 달성을 취임 1년도 채 안 돼 이루는 기염을 토했다.
그림설명: 전세 제도가 가지고 있는 주거사다리 역할의 한계. 집값이 소득보다 빠르게 상승하는 시기에는 전세가 주거사다리 역할을 하지 못한다. [출처: AI생성이미지]
이재명 정부가 서울 고가 아파트에 대한 과도한 과세혜택을 정상화하면서 부동산에서 증시로의 머니무브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으나 오히려 주식 매매 대금이 주택 매입 자금원으로 기능하는 등 거기까지는 아니었다.
서울 아파트 시장에서 전월세 비중 역전은 머니무브가 주택매매가 아닌 임대차시장에서 나올 가능성을 던진다. 주택금융 규제로 영끌을 차단당한 임차인들이 주식 시장을 새로운 자금원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다. 물론 2025년에서 올해 상반기까지의 극적인 주가 상승을 다시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난 2년의 결과는 무주택 임차인들에게 상당한 포모(FOMO·소외 공포감)를 안겼을 수 있다. '만약 그때 내가 월세를 선택하고 잉여 자금을 주식시장에 투자했더라면' 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전세가 저절로 주거사다리가 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임대차 시장에서 임차인들은 월세를 선택하고 여윳돈을 운용할 곳을 찾고 있다. 그렇다면 정부가 할 일은 명확하다. 투자에서 거둘 수 있는 결실과 위험을 함께 고려하는 건전한 투자 문화를 육성하고 자본시장의 선진화를 지속 추진하는 일이다.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증시 개장시장 연장과 같은 변동성을 키우는 정책보다 초보 투자자도 안전하게 장기 투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줘야 한다. 정부의 자본시장 선진화에 올라타지 못한 껄무새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제공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산업부장)
spnam@yna.co.kr
남승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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