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은행이 100만원짜리 채권을 5만원에 팔았다고 채무자의 빚이 5만원으로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시장에서 5만원의 가치로 평가된 채권도 채무자의 삶에서는 여전히 100만원의 무게로 남는다. 부실채권 시장의 냉정한 가격과 채무자가 감당해야 할 가혹한 현실 사이의 간극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3일 국무회의에서 이 간극을 다시 문제 삼았다. 연체채권이 원금의 10% 안팎에 팔리고, 거래를 거듭하며 1~2%까지 가격이 떨어지는 구조를 지적했다. 정부가 원금의 5% 수준에 채권을 사들여 정리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은행이 포기한 빚을 국가가 대신 사들여 채무자의 삶을 구제하자는 얘기다.
사실 정부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지난해 출범한 새도약기금은 7년 이상 연체된 5천만원 이하의 개인 무담보채권을 사들여 상환능력에 따라 소각하거나 조정한다. 평균 매입가율은 딱 5% 안팎, 이달 초까지 액면금액 기준 11조7천억원의 채권을 매입해 약 3조9천억원을 소각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왜 같은 질문을 던졌을까.
올해 상반기 은행권 이자이익은 32조2천억원으로 반기 기준 역대 최대다. 반면 지난해 은행권이 매각한 부실여신은 8조2천억원, 전체 부실여신 정리액의 36.7%였다. 기업여신까지 포함한 수치지만, 은행이 복잡한 채권 재조정보다 매각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여주기엔 충분하다. 가계대출 채무자에게 직접 손을 내미는 일보다 채권을 팔아 재무제표에서 덜어내는 일이 은행에는 더없이 쉽다.
은행은 위험을 감수하고 돈을 빌려준 대가로 이자를 받는다. 연체가 발생하면 충당금을 쌓고, 회수가 어려운 채권을 매각한다. 그 자체를 탐욕이라 비난할 수는 없다. 헐값에 파는 은행조차도 일부 손실은 감내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낮은 가격에 넘겨진 채권이 추심시장에서는 다시 수익을 낼 상품이 된다. 채권자가 바뀌어도 빚은 남는다. 신용거래와 취업, 일상 복귀가 어려워질수록 채무자는 더 깊은 곤경에 빠지고, 사회적 비용도 커진다.
더 불편한 관행도 있다. 일부 은행, 아니 금융회사들은 회수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채권을 대손 인정받아 세제상 혜택을 누리면서도 소멸시효를 연장해 추심을 이어왔다. 금융당국이 이달부터 일정한 개인 무담보채권에 소멸시효 완성을 조건으로 대손을 인정하는 제도를 시행한 이유다. 손실로 인정받은 빚조차 끝내 놓아주지 않았던 모순에 제동이 걸린 셈이다.
금융의 탐욕은 반드시 많이 버는 데에서만 드러나지 않는다. 수익을 따질 때는 철저하면서도, 채무자가 감당하는 비용에는 둔감한 태도에도 있다.
그렇기에 국가의 개입은 필요하다. 장기 연체자를 금융과 노동시장에서 방치하는 것보다 채무조정을 통해 경제활동에 복귀시키는 편이 개인에게도 사회에도 이익이다. 채무 소각이 단순한 시혜가 아닌 경제정책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만 정부의 채권 매입에는 분명 재정이 들어간다. 어떤 채권을 얼마에 매입하고 누구에게 감면할지, 그 선택이 공정하고 효과적인지 끊임없이 검증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부실채권의 마지막 책임을 국가가 떠안을 필요는 없다. 개인채무자보호법 시행 이후 은행은 이미 자체 채무조정을 시행 중이다. 중요한 것은 채무조정을 예외적인 구제 절차가 아니라 부실 관리의 실질적인 수단으로 만드는 일이다. 소극적 조정이 적극적 조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유인이 절실하다.
무분별한 탕감은 성실 상환자와의 형평성을 해치고 도덕적 해이를 낳을 수도 있다. 그래서 갚을 능력이 있는데도 갚지 않는 사람과, 갚고 싶어도 갚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구분돼야 한다. 더 정교한 심사와 채무조정이 필요한 이유다.
고금리가 장기화되면 부실채권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국가가 뒤늦게 사들이고 지우는 방식만으로는 끝이 없다. 금융의 수익을 무조건 탐욕이라 매도할 이유는 없지만, 그 수익에 수반되는 책임도 금융회사의 몫이어야 한다.
국가가 국민의 실패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금융이 져야 할 책임까지 국민의 세금으로 대신해야 할까. 포용금융의 성패는 국가가 얼마나 많은 빚을 지워주느냐가 아니라, 금융회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빚의 벼랑 끝에서 돌아서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경제부 정치팀 차장)
(서울=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13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6.10.13 xyz@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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