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2012년 여름, 유로존은 벼랑 끝에 서 있었다. 그리스는 국가부도 직전까지 몰렸고, 스페인과 이탈리아 국채금리는 치솟았다. 지나고 보니 시장은 이들 유럽국가의 재정적자를 걱정한 것이 아니었다. 진짜 공포는 "유럽 정치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당시 유럽은 돈이 부족해서 흔들린 것이 아니다. 정치가 늦었기 때문에 무너질 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럽연합(EU)은 통화를 공유했지만, 재정은 각국 정부의 몫이었다. 재정위기가 터지자 독일은 긴축을 요구했고 남유럽 국가들은 성장을 주장했다. 각국 선거와 의회, 국민 여론이 충돌하는 동안 시장은 유럽 정치권이 문제를 통제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국채가 흔들리자 유럽의 은행들이 흔들렸고, 은행이 흔들리자 유로존 전체가 흔들렸다. 위기의 본질은 부채가 아니라 신뢰였다.
위기를 진정시킨 것도 재정개혁이 아니었다. 마리오 드라기 당시 ECB 총재의 "유로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겠다(Whatever it takes)"는 단 한 문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시장은 숫자를 본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의지를 본 것이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14년여가 지난 지금, 유럽은 다시 정치의 시험대 위에 올라 있다. 최근 프랑스 국채시장이 심상치 않다. 프랑스 10년물 국채금리는 빠르게 상승했고 유로화 가치는 올해 들어 달러 대비 4% 넘게 하락했다. 일부 투자자들은 유로존 재정위기 당시처럼 유로화 대신 스위스프랑으로 자금을 옮기고 있다. 프랑스 정부가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5% 이하로 낮추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국채 매도세를 자극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2010년대 그리스와 상황이 비슷해 보인다. 재정적자가 늘어나고, 국채금리가 급등하고, 정치권은 분열돼 있다. 시장은 국가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차이도 존재한다. 그리스는 유로존 주변국이었지만 프랑스는 유럽의 핵심국가다. 그리스는 디폴트 가능성이 문제였지만 프랑스는 성장 없는 부채 증가가 문제다. 즉 당시 위기가 '당장 돈을 갚을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면 지금 프랑스의 위기는 '앞으로도 감당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 가깝다.
더 우려되는 건 재정 자체보다 정치의 방향이다. 최근 유럽 곳곳에서 긴축정책과 복지 축소에 반대하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극우 정치세력이 부채 상환 자체를 문제 삼고 있고, 이탈리아와 포르투갈 등에서도 생활비 상승과 공공지출 축소에 대한 불만이 거리로 쏟아지고 있다.
연합뉴스 그래픽
유럽의 정치 양극화는 이제 경제 변수로 전환되고 있다. 시장은 재정적자 규모보다 '이 나라가 개혁을 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문제는 유럽 경제의 체력이 과거보다 약해졌다는 점이다. 저렴한 러시아산 에너지 시대는 끝났다. 중국은 더 이상 유럽 제품의 무한한 소비시장이 아니다. 오히려 전기차와 배터리, 태양광 산업 등에서 유럽시장을 잠식하는 경쟁자가 됐다. 안보 역시 미국에 의존하기 어려워지면서 국방비 부담이 커지고 있다. 과거 유럽이 누렸던 '값싼 에너지·거대한 중국 시장·미국의 안보 우산'이라는 세 축이 동시에 흔들리고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성장은 둔화하는데 지출은 늘어난다. 이 조합은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다. 정권은 지출을 줄여야 하지만 유권자는 복지의 축소를 원하지 않는다. 재정을 건전하게 만들려면 고통이 필요하지만 선거는 고통을 싫어한다. 결국 정치가 경제를 따라가지 못하면 시장은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한다. 최근 유럽의 국채금리는 경제지표가 아니라 정치에 대한 투표장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유럽이 맞이한 위기는 2010년대의 유로존 위기와 닮은 듯 다르다. 당시엔 그리스라는 작은 균열이 시스템 전체를 흔들었다면, 지금은 유럽의 성장모델 자체가 도전받고 있다. 위기의 진앙이 특정 국가가 아니라 정치와 경제의 구조적 충돌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더 복잡하다.
다만 아직 시장이 2012년의 공포를 재현할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ECB라는 강력한 안전판이 존재하고, 유럽 금융시스템의 복원력도 과거보다 높아졌다. 그럼에도 투자자들이 유럽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이유는 분명하다. 역사는 위기가 재정에서 시작되는 경우보다 정치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장은 언제나 숫자를 분석한다. 그러나 시장의 폭락은 숫자가 아니라 정치가 만들곤 한다. 2012년 유럽이 그랬고, 지금의 프랑스가 다시 그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결국 시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재정적자 그 자체가 아니다. 적자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 리스크에 대한 걱정이 시장을 지배하는 것이다. 비단 프랑스 만의 일은 아니다. 모든 국가는 정책을 끌고 가고, 오류를 제때 수정하는 정치의 의지와 역량이 충분한가라는 시장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편집국장)
chhan@yna.co.kr
한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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