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위원 12명 중 10명, 조작 알았다면 반대했거나 반대 가능성
정부 개입 이후 증거는 '오염'…이재용 무죄·손배 기각도 못 뒤집어
(서울=연합인포맥스) 윤영숙 기자 =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국민연금이 찬성의 근거로 삼았던 2조원대 시너지 효과가 없었다면 국민연금이 합병에 반대했을 것이라는 국제중재판정부의 판단이 나왔다.
당시 국민연금 투자위원회 위원 12명 중 10명은 시너지 효과가 조작됐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합병에 반대했거나 반대했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정부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과의 국제투자분쟁(ISDS)에서 재차 패소한 것은 정부의 부당한 개입이 없었다면 국민연금이 합병에 반대했을 것이라는 인과관계가 인정됐기 때문이다.
21일(현지시간) 공개된 엘리엇 ISDS 환송중재 판정문에 따르면 중재판정부는 정부 개입이 없었더라도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했을 것이라는 우리 정부의 주장을 증거 부족을 이유로 배척했다.
[연합뉴스TV 제공]
◇ '2조 시너지'가 합병 찬성 좌우…12명 중 10명 진술 주목
이번 환송 중재의 핵심 쟁점은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합병 찬성이라는 동일한 결과가 나왔을 것인지였다.
정부는 국민연금이 장기적인 주주가치 증대와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선, 합병 무산에 따른 주가 하락 가능성 등을 고려해 합병에 찬성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판정부는 국민연금의 찬성 여부를 결정한 핵심 요인으로 조작된 합병 시너지 효과를 지목했다.
판정문에 따르면 당시 국민연금 리서치팀은 합병비율에 따른 보유지분 가치 차이로 1천388억원의 순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추정했다. 이를 상쇄하기 위해 약 2조1천억원의 시너지 효과를 역산했다는 점이 중재 과정에서 쟁점이 됐다.
판정부는 제229항에서 투자위원들의 법정 증언과 검찰 진술을 근거로, 시너지 효과가 조작됐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12명 중 10명이 합병에 반대했거나 반대했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밝혔다.
당시 투자위원회 회의록에 '시너지 등을 고려하여' 합병에 찬성했다는 내용이 명시된 점도 근거로 제시했다.
판정부는 "시너지 효과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는 사실은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이었음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조작된 시너지를 제외하면 국민연금의 예상 순손실을 상쇄할 수 없었고, 투자위원회가 합병에 반대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판정부는 이에 따라 "국민연금은 보건복지부의 지침과 지시에 따라, 전문위원회가 아니라 투자위원회가 투표를 하도록 하고, 실제로 근거가 없는 본건 합병의 시너지 효과를 조작하고 투자위원회 위원들과 만나는 등, 투자위원회가 본건 합병에 찬성 투표하도록 투자위원회의 투표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고 판단했다.
[출처: 연합뉴스 자료사진]
◇ 정부 개입 이후 증거 '오염'…개입 이전 자료만 인정
판정부는 정부 개입이 없었더라도 국민연금이 찬성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입증하려면 개입 이전의 증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보건복지부가 국민연금의 합병 표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처음 접촉한 2015년 6월 30일이 기준점이었다.
판정부는 제239항에서 "후발하는 모든 증거는 개입으로 인해 오염되었으며, 피청구국의 주장은 오염되지 않은 증거에 의해서만 입증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정부가 자신의 위법한 개입으로 형성된 결과를 근거로 개입이 없었더라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취지다.
개입 이전 자료를 검토한 결과도 정부에 불리했다.
판정부는 엘리엇의 합병 반대 활동과 국민연금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의 SK그룹 계열사 합병 반대 결정 등을 고려하면 국민연금이 삼성물산 합병에도 반대할 가능성이 오히려 커졌다고 봤다.
국민연금이 합병 무산 가능성에 대비해 제일모직 지분을 줄이고 삼성물산 지분을 늘리기 시작했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했다.
(서울=연합뉴스) 김도훈 기자 =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부당 합병과 이를 위한 회계 부정을 지시한 혐의를 받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7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2023.4.7 superdoo82@yna.co.kr
◇ 이재용 무죄·국내 손배 기각 판결도 정부 주장 뒷받침 못 해
정부는 환송중재 과정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의 부당합병 관련 형사재판과 삼성물산 주주들의 국가배상 소송 등 국내 법원 판결 5건을 추가 증거로 제출했다.
특히 국내 법원은 정부의 위법 행위와 주주 손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판단한 바 있다.
그러나 판정부는 이들 판결이 정부의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한다고 봤다.
국내 판결은 당시 의사결정에 관한 1차 증거가 아니며, 국내 소송과 국제투자중재는 적용 법률과 증거 기준 등이 다르다는 이유에서다.
판정부는 국내 법원이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면서도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의 유죄 확정판결을 뒤집은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중재판정부는 국내 법원 판단과 별개로 제출된 증거 전체를 토대로 독립적으로 사실관계를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출처: 연합뉴스 자료사진]
◇ 국민연금 국가기관 아니어도 정부 배상책임 인정
앞서 영국 법원은 지난 2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자체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상 한국 정부의 조치로 볼 수 없다며 기존 중재판정을 일부 취소했다.
다만 청와대와 보건복지부의 협정 위반 행위에 관한 판단은 유지하고, 이로 인한 손해배상 책임을 다시 심리하도록 했다.
환송중재 판정부는 국민연금이 국가기관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정부 개입과 엘리엇의 손실 사이에 사실적·법적 인과관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국민연금이 합병 표결에서 사실상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었던 만큼 정부 개입이 합병 결과와 엘리엇의 손실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에 배상원금 4천849만달러와 연 복리 5%의 이자, 중재 관련 법률 비용 등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법무부가 판정 당시 집계한 상계 후 정부 지급액은 약 1천530억원이다.
다만 이번 판정은 삼성물산 합병 자체의 무효 여부나 이재용 회장의 형사책임을 판단한 것은 아니다.
정부의 위법한 개입이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미친 영향과 그로 인한 외국인 투자자의 손실에 대해 국가가 배상책임을 지는지를 판단했다.
ysyoon@yna.co.kr
윤영숙
ysyo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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