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1990년까지 국내 금융시장은 '조상제한서(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은행)'가 주름 잡았다. 이들 은행은 수많은 대기업의 돈을 주무르면서 한국 경제 혈관 역할을 담당했다. 이 5대 은행의 협조 없이는 정부가 금융정책을 펼칠 수 없을 정도로 나라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은행장의 한마디는 곧 기업의 목줄이요, 서민들의 생계였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맞으면서 대마불사와 같았던 조상제한서는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구제금융의 대가로 대대적인 금융 구조조정이 단행되면서 금융회사의 대영화와 겸업화를 촉진했고, 금융지주회사 체제가 형성되면서 현재의 4대 금융지주(KB·신한·하나·우리)로 재편됐다. 하늘 같은 은행장 위에 금융지주 회장이라는 더 높은 하늘이 열린 것이다.
금융지주 체제에 들어서면서 지주 회장은 은행뿐 아니라 증권·보험·카드 등을 총망라한 그룹 전략을 제시하고 조직을 이끄는 가장 강력한 플레이어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정통 금융인도 아닌 정치인, 관 출신, 교수 등 정권의 인맥을 타고 오면서 출신도 다양했다. 회장의 존재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은행장은 그림자 존재로 짙어졌다. 그렇다 보니 주목받는 자와 밀려나는 자 사이의 반목과 대립의 역사가 이어졌다.
KB금융지주는 2008년 지주사 전환 이후 회장과 행장의 알력 다툼이 반복됐다. 결국 전산시스템 교체를 놓고 'KB사태'로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다 회장·행장이 동시에 물러나는 초유의 사태가 터졌다. 우리금융 역시 회장과 행장이 주요 의사결정을 할 때마다 마찰을 빚었다. 회장이 은행장 권한이 축소되는 조직개편을 시도하거나 임기를 1년만 부여하는 식으로 견제하고, 행장은 참호를 구축해 반발했다. 하나금융도 연임·3연임 하는 회장 때문에 늘 2인자에 머물러야 했던 불만이 터졌었고 신한금융 역시 회장-사장-은행장이 경영권 등으로 충돌하며 법정 공방으로 비화한 '신한사태' 스캔들을 겪었다. 그래서 일부 지주사는 그룹의 평온을 도모하고자 회장이 행장을 겸임하기도 했다.
당초 금융지주 도입 취지는 대형화, 겸업화를 통해 글로벌 금융환경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기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생긴 부실 은행을 구조조정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다 보니 지주사에 걸맞은 지배구조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회장-행장 간 알력 관계에서 오는 부작용이 이렇게 클 줄 예상하지 못했던 거다. 회사의 장기 비전을 추구하는 대신 권력 투쟁과 단기 실적에 집착하는 행태가 이어졌고, CEO 교체기마다 정부와 정치권, 금융당국까지 들썩였다.
지주 회장과 은행장은 참 오묘한 관계다. 금융지주는 은행·증권·보험·카드 등 계열사 지분 100%를 갖고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전략을 구상한다. 물론 계열사 대표에 대한 인사권도 금융지주에 있다. 회장이 자신과 함께 갈 수 있는 최적의 파트너를 찾아 임명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문제는 이들이 수직적 상하 관계만은 아니라는 거다. 회장은 3년마다 사외이사와 주주들에게 평가받아 연임에 도전하는데, 내부에서 일순위 견제 대상은 '넘버2'인 은행장이다. 회장은 먼저 손을 내밀었던 파트너를 경쟁 상대로 맞이해야 한다. 자리를 지키려면 은행장의 견제를 이겨내야 한다. 충성과 도전 사이에 직면한 은행장의 고민도 선택이 아닌 필수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처럼 은행장은 '권력에의 의지'인 인간의 본성대로 행하는 게 당연한 이치다. 자리를 지키려는 자와 도전하는 자. 회장과 행장이 건강하게 싸우면서 아름답게 공존할 수 있을까.
연말이 다가오자 금융당국은 또다시 금융회사의 지배구조 문제를 수면 위로 부상시켰다. 금융지주 회장을 직접 목표로 하기보다 이번엔 은행장 인사를 전면에 부각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회장 교체 시즌이 아니기에 연말 인사에서 가장 중요한 은행장을 건드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금융지주 자회사 CEO 승계 절차가 미흡하고 자회사 임추위의 역할도 제한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특정 계파나 친소관계가 아닌 경영 능력을 중심으로 자회사 CEO를 선임하라고 했다. 전일인 28일에는 금융지주 이사회 의장들을 불러 모아 거수기 이사라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연말 은행장 인사가 공정하게 이뤄지는지 제대로 견제하라고 경고했다. 이쯤 반복했으면 현 은행장들의 선임 절차가 못마땅했다는 얘기고, 연말 임기가 만료되는 5대 은행장 자리에 새로운 인물을 앉히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게 과하진 않다고 본다.
사실 지주 회장이 은행 등 자회사 인사, 투자 등 경영에 필요 이상으로 개입하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3년 전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취임 일성으로 금융회사 지배구조 개혁을 꺼냈다. 지주 회장들이 제왕적 권력을 휘두른다는 전제로 지주사가 자회사 업무를 지시하거나 CEO 인사를 할 때 자회사 의견을 묻도록 하고 회장의 모든 지시를 문서화하는 등 부당한 경영간섭을 차단하는 방안들을 내놨다. 최종구 금융위원장 시절에도 CEO 선출 절차 투명화 방안을 내놨고, 은성수·고승범·김주현 장관 때에도 지배구조 개편은 빠지면 싱거운 핵심 화두였다.
이렇듯 금융당국은 지주사 체제 출범 이후 20년 동안 주인없는 금융회사의 지배구조 문제를 이번에는 반드시 뜯어고치겠다고 숨 쉴 틈 없이 경고했다. 그런데도 왜 변하지 않는 걸까. 자리에 집착하는 지주 회장, 은행장의 애매모호한 위치, 그리고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금융당국의 욕망이 한데 어우러진 실패작이라 말하고 싶다.
이 원장은 자리에 도전하는 은행장을 품을 만한 포용력 있는 지주 회장이 없다고 봤다. 충성을 맹세하는 말 잘 듣는 인물을 은행장에 앉혀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는 권력을 겨냥한 것이다. 은행장의 존재감을 키워야 회장의 힘을 뺄 수 있기 때문이다. 은행 임원후보추천위원회(임추위)에 후보 추천권을 부여하고 최종 면접에도 참여하도록 하는 식의 은행 이사회 권한을 강화한다고 달라질까. 자칫하면 반대표를 무기 삼아 또 다른 알력 다툼으로 번질 불씨만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번 지배구조 개선이 조금이라도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면 당국의 세련된 접근이 필요하다. 규정만 고치도록 해 인위적으로 회장 권한을 축소하는 방법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지주 회장이 은행장을 포함한 계열사 CEO의 위에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지금보다는 수평적인 관계에서 선의의 경쟁을 펼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게 중요하다. 지배구조 개선은 한순간에 이뤄지는 게 아닌 만큼 당국 수장들도 '성과를 반드시 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도록 곪은 곳부터 발라내는 데 초점을 맞추길 바란다. (금융부장)
hjlee@yna.co.kr
이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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