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은 지금] 'BBB'에 트럼프가 숨겨둔 악성 코드
(뉴욕=연합인포맥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밀어붙이는 예산조정법안, 일명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 Act·BBB)'은 감세에 초점을 맞춘 법안이다.
개인 소득세율과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 세액공제 확대 등의 기한 연장을 담고 있는 이 법안은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인 2017년 도입됐던 조치를 연장하는 게 기본 골자다. 대규모 감세에 따른 세수 감소를 사회복지 지출 감축으로 보전하도록 세출입 구조를 바꾸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장장 1천116쪽에 달하는 이 법안은, 사실 감세안이라고만 부르기엔 너무 방대하다. 총 11개의 하위 위원회 소관, 그 아래에 수백개의 하위 섹션으로 구성된 대규모 법안으로 다양한 분야의 예산 분배와 조건을 망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하지만 방대한 만큼, 교묘하게 숨겨진 장치들이 있다. 예산조정법안은 '예산조정 절차의 원칙'에 따라 오직 예산과 지출 항목만 법안에 담아야 하는데 'BBB'는 일반 법안적 요소를 상당수 감추고 있다는 게 미국 언론의 공통된 지적이다.
그중에서도 미국 언론이 주말간 기사를 대거 쏟아내며 가장 문제로 삼은 부분이 이른바 '사법부 무력화' 조항이다.
미국 격월간 정치 전문지 아메리칸프로스펙트는 'BBB에 숨겨진 10가지 교묘한 조항'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BBB는 예산법이라는 외형을 이용해 행정부 관료들이 법원의 명령을 무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매체는 "법원이 행정부 관계자에게 법정모욕죄(contempt)를 적용해도 이 법안은 이를 집행하는 데 예산을 쓰지 못하도록 막는다"며 "이는 트럼프와 측근이 법원 명령을 계속 무시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로 위헌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성토했다.
문제가 되는 조항은 섹션 번호 70302의 자금 사용 제한(restriction of funds) 조항이다. 이 조항은 "미국의 어떤 법원도 연방민사소송규칙 제65(c)조에 따라 발부된 금지명령이나 임시금지명령에 대해 보증금(security)이 제공되지 않은 경우, 해당 명령을 불이행했다는 이유로 내려진 법정모욕죄 판결을 집행하기 위해 배정된 예산을 사용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쉽게 말해 이 조항은 원고가 보증금을 걸지 않았다면 법원이 법정모독으로 처벌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뜻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보통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선 보증금을 내는 경우가 드물다"며 "따라서 보증금을 내지 않은 소송 안건은 법원이 법정모독으로 처벌할 수 없게 되고 이는 트럼프 행정부에 제동을 건 가처분 명령 중 상당수가 효력을 잃게 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UC버클리의 어윈 케머린스키 법대 학장은 "이 조항은 반독점 소송, 경찰개혁 소송, 학교 인종통합 관련 소송 등 대부분의 기존 가처분 명령을 집행 불가능하게 만든다"며 "연방법원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것 외에 어떤 목적도 없다"고 비판했다.
콜로라도주의 조 네구스 민주당 하원의원은 CNN에 "트럼프 행정부는 사실상 모든 법원에서 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조항을 삽입했다"며 "이 조항은 연방 법원이 법정모독 명령을 집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게 목적으로 헌법상 사법부에 대한 공격의 일환이자 사실상 위헌"이라고 말했다.
AP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후 현재까지 행정명령 및 정책 조치를 둘러싸고 제기된 소송은 82건 이상이고 이 중 대부분은 법원이 전면 또는 일부 금지 판결을 내렸다.
케머린스키는 "이 조항이 시행되면 연방 법원의 권한에 대한 '충격적인 제한'이 될 것"이라며 "연방 대법원은 오랫동안 법정모독 권한이 연방법원의 핵심적 권위라고 인정해왔기 때문에 법원이 내린 명령을 강제할 수 없다면 그건 그냥 조언일 뿐 누구도 따를 필요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건 헌법을 위반하거나 법을 어긴 트럼프 행정부를 제재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며 "상·하원 모두 이 조항을 거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UC 버클리 공공정책 교수이자 전 노동장관인 로버트 라이시도 '서브스택'에 올린 글에서 "향후 의회가 트럼프를 견제하려 해도 법원이 판결을 집행하지 못한다면 무의미하다"며 "이 조항은 트럼프를 사실상 '왕'으로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자금 사용 제한 조항이 의회 상원에서 단순 과반으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특별 절차 조건을 충족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며 "이런 절차를 사용하는 법안은 모든 조항이 연방 정부 수입에 직접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엄격한 규칙이 있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미국 상원은 현재 공화당이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공화당 내부에서조차 BBB에는 문제가 많다며 '칼질'이 필요하다고 벼르는 의원이 많다.
이른바 '버드 룰(Byrd Rule)'은 상원에서 대대적인 조정의 근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원칙에 따라 예산과 관련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모든 법안은 삭제된다.(진정호 뉴욕특파원)
jhjin@yna.co.kr
<저작권자 (c)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