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가우디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2025.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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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엘 공원'의 전경이 보이는 이미지이다.

찬란한 햇빛이 내리쬐는 거리, 탐스러운 오렌지나무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도로 타일, 맨홀 뚜껑도 선명한 색으로 존재감을 뽐낸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생동감 넘치는 자유로운 도시다. 네모반듯한 건물 대신 상상 속 궁전처럼 곡선으로 이뤄진 건물과 집은 도시를 감상하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게 한다.

 

일등 공신은 단연 전설적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다. 바르셀로나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건물이 총 9개인데, 그중 7개가 가우디의 작품이다. 근교까지 합하면 15개가 넘는다. 안토니 가우디의 인생이 집약된 대표작을 만나보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조형물 이미지이다.

가우디의 멋진 파트너, 구엘 공원(1900~1914)

어릴 적부터 허약한 탓에 동급생보다 많은 나이로 바르셀로나 건축대학을 졸업한 가우디는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쓰일 유리 전시장 제작을 맡게 됐다. 나무와 유리, 금속 등이 어우러진 그의 공예품에 반한 사람이 있었으니 다방면의 사업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재력가 구엘이다.

 

가우디의 스승이었던 푼티의 작업실에서 가우디와 구엘이 만났다. 그리고 1918년 구엘이 사망할 때까지 35년 동안 가우디는 구엘 가문의 건축 일을 도맡았다. 구엘 덕분에 초보 건축가에게 여러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영국의 유서 깊은 정원과 전원주택을 둘러보고 온 구엘은 상류층을 위한 특별한 주택 단지를 계획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60구역으로 나눈 택지 중 공사가 끝난 후 2곳만 팔려 사실상 실패한 사업. 심지어 구매자 중 한 명은 설계를 맡은 가우디 본인이다. 실망스러운 과거가 무색하게 지금의 구엘 공원에는 연간 3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아온다.

입구에 자리한 건물 두 채부터 눈이 휘둥그레지는 가우디투어가 시작된다. 눈이 내려앉은 것처럼 하얗고 울퉁불퉁한 지붕과 쿠키색 벽은 마치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집 같다. 양쪽으로 갈라진 계단 가운데 구엘 공원을 대표하는 상징물 도롱뇽이 연신 물을 뱉어낸다. 방문객의 쉼터가 되어주는 벤치조차 직선이 없다.

 

오롯이 곡선으로 이뤄진 의자는 세상의 색을 모아놓은 것처럼 알록달록하다. 가우디는 설계 당시 의자 모양 틀에 인부를 앉혀 신체 각 부위에 가해지는 압력과 하중을 측정해 인체공학적인 구조로 만들었다. 형형색색의 타일은 깨진 타일을 재활용하거나 주문 제작한 타일을 일부러 깨서 붙였다.

 

완벽주의자였던 가우디는 끊임없이 수정을 요구했고, 미장공과의 불화가 깊어져 당시 신문에도 소개될 정도였다. 다양한 식물과 나무가 숲을 이룬 산책로 곳곳에는 따가운 햇살을 피할 수 있는 회랑이 있고, 모든 구조물은 본래의 모습을 최대한 살려 만들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화합을 이루는 것이 가우디 건축의 핵심 철학이다.

'카사 바트요' 외벽 창문 이미지이다.

푸르른 바닷속으로, 카사 바트요(1904~1906)

그라시아 거리는 각종 명품 숍과 상점이 가득한 쇼핑의 중심지다. 여기에 가우디의 건축물 두 채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먼저 건축된 카사 바트요는 섬유업계 명문가인 조셉 바트요의 집이다. 바트요는 18세기에 지어진 집을 당시 유행하던 독특한 양식의 건물로 개조하기 위해 건축가를 찾기 시작했다.

 

개성 있는 작업을 두루 선보이던 가우디에게 반한 바트요가 작업을 의뢰했다. 카사 바트요를 지을 당시 바르셀로나의 명망 있는 건축가 중 그라시아 거리에 자신의 작품이 없는 사람은 건축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화려한 쇼핑 거리에 마치 예술 작품을 전시하듯 건축가의 개성을 뽐낸 건물이 여전히 즐비한 이유다.

대로변에 자리한 카사 바트요는 가우디 특유의 형태와 컬러 덕분에 멀리서도 눈에 띈다. 괴물의 입 같은 커다란 창문과 해골 모양의 발코니는 온통 곡선으로 이뤄졌고, 알록달록한 타일이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인다. 지붕과 벽이 만나는 지점에는 잔잔한 파도 같은 주름을 넣어 변화무쌍한 포인트를 주었다.

 

강렬한 인상의 외관처럼 내부 역시 독특하다. 계단 손잡이는 용의 뼈를 상징하듯 울퉁불퉁하고, 카사 바트요의 백미로 알려진 중정은 채도가 다른 푸른색 타일로 뒤덮여 청량하고 드넓은 지중해 바다를 연상시킨다. 공룡의 등뼈 또는 산호초 같기도 한 옥상의 굴뚝과 지붕까지 카사 바트요는 바닷속에 지은 집처럼 몽환적이고 아름답다.

'카사 밀라'의 물결치는 외관이 돋보이는 이미지이다.

물결치는 외관, 카사 밀라(1906~1910)

딱딱하고 무거운 돌을 사용해 층간 구분 없이 건물 전체가 하나의 돌처럼 보이도록 만든 카사 밀라. 일렁이는 파동의 석조 입면을 감상하려면 건물 반대편에서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하는 것이 좋다. 건축 당시 무거운 돌을 나르고, 어긋난 부분을 수없이 갈아내는 복잡하고도 정교한 디테일 탓에 공사비는 애초 계획보다 천문학적으로 늘어났다.

카사 밀라는 1900년대 초반에 지은 건물이지만 자주식 지하 주차장과 중앙난방, 온수가 나오는 수도 시설, 전기 엘리베이터까지 갖춘 최고급 빌라다. 층마다 서로 다른 디자인의 입면과 창으로 개성을 더했다. 또 색채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가 오직 한 가지 색만으로 외관을 꾸민 것도 눈여겨볼 포인트.

 

외관과 달리 내부에 들어서면 벽과 천장을 가득 메운 화려한 벽화가 반긴다. 특히 옥상은 이질감이 극대화되는 공간이다. 계단을 통해 언덕을 오르내리는 동선 중간에 투구를 쓴 듯 기묘한 모양의 굴뚝과 거대한 환기탑이 다른 행성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이 건물을 짓는 동안 가우디는 각종 불법에도 굴하지 않았다. 공사 울타리가 거리를 침범하고, 건물 역시 허가 면적보다 크게 지었지만, 카사 밀라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시정 명령은 철회되길 반복했다. 늘어난 공사비를 받으려는 가우디와 밀라 가족 사이의 지루한 재판은 7년이나 이어졌고, 이를 계기로 가우디는 성당 일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작업도 맡지 않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전경이 보이는 이미지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내부' 이미지이다.

가우디의 현재 진행형 유산, 사그라다 파밀리아(1883~)

한 세기 넘게 공사 중인 가우디의 역작,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대성당)가 완공을 앞두고 있다. 가우디 서거 100주년이 되는 2026년이 완공 목표다. 지난해 10월 성당 중앙탑 6개 중 5개가 완공됐다는 뉴스가 보도됐을 정도로 성당과 관련된 소식은 전 세계인의 관심을 끈다.

 

한 번이라도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이 낯선 건축물을 조우했을 때의 감격을 쉽게 잊을 수 없다. 낮은 건물 사이, 저 멀리 건축과 장식의 구성 요소, 조형미, 기능과 형태, 외부와 내부 사이에 완벽한 조화를 추구한 장엄한 성당이 주는 감동은 가까이 갈수록 점점 커지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면서 절정에 다다른다.

 

입구와 첨탑을 장식한 조각은 오랜 세월에 걸쳐 제작해 색도, 만든 사람도, 스타일도 조금씩 다르지만 섬세한 디테일과 종교적 스토리텔링은 무신론자에게도 감동으로 다가온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빛으로 알록달록 물든 성당 안은 숲속 같다. 묵직한 기둥에서 퍼져 나가는 가지는 튼튼한 나무 같아 천고가 높은데도 안온한 느낌이 든다.

가우디는 31세라는 어린 나이에 성당 건축의 총감독에 임명됐다. 건축학교를 졸업한 지 불과 5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파격적인 일이었다. 1882년 시작된 공사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새로운 건축가 가우디에게 맡겨졌고, 그는 가장 먼저 전임자였던 비야르의 설계도부터 폐기하고 새로운 형식의 도면을 그렸다.

 

예수의 탄생부터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기적과 열두 사도의 상징물을 표현하고자 했다. 북쪽을 제외한 동, 서, 남쪽에 ‘탄생’, ‘수난’, ‘영광’을 주제로 한 파사드 3개를 만들고, 각각 4개씩, 12개의 탑을 세우는 거대한 계획이다. 가우디는 생전 이 공사가 약 200년이 걸릴 것이라 예상했고, 그는 25% 정도만 완성할 수 있었다.

 

공사는 고질적인 자금난 때문에 더디게 진행됐다. 하지만 그때마다 가우디는 꾸준히, 성실하게 작업에 매진했다. 세상을 떠나기 8개월 전에는 구엘 공원에 있던 집을 두고 성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의 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가우디의 하루는 ‘아침 미사, 성당 작업, 산책, 고해성사’로 이뤄졌을 만큼 단조로웠다.

1926년 6월 7일, 일을 마치고 성당을 나선 가우디는 교차로에서 전차에 부딪쳤다. 허름한 행색 탓에 아무도 그가 대성당을 짓는 건축가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뒤늦게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그는 세상을 떠났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지하의 카르멜 예배당에 묻혔다. 자연을 사랑한 천재 건축가의 뚜렷한 신념이 깃든 유산은 도시 곳곳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다. 곧 완공될 가우디의 마지막 작품만으로도 여행을 떠날 이유는 충분하다.

이 콘텐츠의 원문은 GOLD&WISE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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