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궤적을 따라, 크라쿠프

2025.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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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500년 왕실 역사를 간직한 '바벨 성'이다.

폴란드의 500년 왕실 역사를 간직한 바벨 성. 단풍으로 물든 비스와 강변 공원과 어우러져 가을의 운치를 더한다.

여행객을 매료시키는 도시는 크게 두 부류다. 우뚝 치솟은 마천루가 위용을 뽐내는 미래적인 도시거나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문화유산으로 채워진 역사 도시거나. 크라쿠프(Kraków)는 후자에 속한다. 17세기 바르샤바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크라쿠프는 500년 이상 왕이 머물던 폴란드의 옛 수도이자 역사 문화의 중심 도시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는 눈길 닿는 것마다 중세로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감상을 안긴다. 폴란드가 낳은 천재 작곡가 쇼팽의 선율이 흐르고, 독일 나치군의 주둔지였던 비통한 역사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기록한다. 이 도시와 친해질수록 환희와 안타까움이 무수히 교차한다. 마치 과거의 영광도, 치욕도 잊지 않겠다는 듯 크라쿠프는 지난 시간을 품은 채 꼿꼿하고 고고하게 서 있다.

'중앙시장광장'의 터줏대감은 우뚝 솟은 첨탑 두 개가 인상적인 '성모 승천 교회'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둘기 떼다

중앙시장광장의 터줏대감은 우뚝 솟은 첨탑 두 개가 인상적인 성모 승천 교회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둘기 떼다.

성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성모 승천 교회 예배당'이다.

성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성모 승천 교회 예배당. 중앙에 위치한 승천제단화는 폴란드의 국보 유물이다.

광장의 가장 아름다운 전망을 즐길 수 있는 '수키엔니체 테라스'이다.

광장의 가장 아름다운 전망을 즐길 수 있는 수키엔니체 테라스.

크라쿠프의 심장

유럽 국가들의 광장은 어딘가 비슷한, 낯익은 풍경의 연속이다. 보통 대성당이나 동상, 분수가 광장 한복판을 차지하고, 그 주변으로 노천카페와 상점이 에워싸는 식이다. 크라쿠프 구시가 중심에 자리한 중앙시장광장(Rynek Główny)도 이 공식을 따른다. 딱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광장의 터줏대감이 14세기부터 자리를 지켜온 시장이라는 점이다.

 

물자가 들고나는 상업 도시로서 크라쿠프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수키엔니체(Sukiennice)는 직물 길드관으로, 국제적인 무역 거래소였다.

 

15세기 황금기에는 동양의 향신료와 비단, 가죽이 이곳을 통해 들어오고 크라쿠프 근교 비엘리치카 소금 광산(Wieliczka Salt Mine)에서 생산한 소금과 직물이 수출됐다. 이곳은 여전히 사람을 불러 모으는 상점들로 가득하다. 건물 위층은 19세기 폴란드 회화와 조각 등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꾸며서 한 번쯤 둘러볼 만하다.

매시간 정각에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와 우뚝 솟은 첨탑 두 개가 발길을 붙드는 성모 승천 교회(Bazylika Mariacka)는 도시의 랜드마크다. 성모 마리아 교회라고도 하는 이 건물은 폴란드 고딕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화려한 채색이 돋보이는 교회 내부는 폴란드 국보 유물로 가득하다. 교회 중앙에 자리한 승천제단화가 대표적이다. 후기 고딕양식의 대가인 독일의 조각가 바이트 슈토스(Veit Stoss)가 만든 높이 13m, 너비 11m의 목조 제단은 유럽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나치가 약탈해간 이 문화재를 되찾기 위해 애쓴 세월이 짐작될 정도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 주변으로 펼쳐진 파란색과 금색, 붉은색을 활용한 스테인드글라스 장식과 벽화 역시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예배당 의자에 앉아 찬찬히 음미하듯 감상하길 추천한다.

'바벨 성' 맞은편에 바라보이는 신시가 전경이다.

바벨 성 맞은편에 바라보이는 신시가. 크라쿠프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열기구와 대관람차 탑승은 한번쯤 시도해볼 체험거리다.

바벨 대성당의 예배당 총 18개 중 르네상스 건축의 역작이라 불리는 '지기스문트 예배당' 외관 사진이다.

바벨 대성당의 예배당 총 18개 중 르네상스 건축의 역작이라 불리는 지기스문트 예배당. 종탑에는 둘레 8m에 달하는 폴란드 최대 크기의 종이 있는데, 이 종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고 믿어 많은 방문객이 찾는다.

왕의 길목을 따라 바벨 성으로

크라쿠프의 9월은 선선한 날씨 덕분에 여행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중앙시장광장은 세계 곳곳에서 온 관광객을 태운 마차 행렬과 인파로 복잡하고 분주하다. 광장의 활기를 엿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는 수키엔니체 테라스다. 이곳 테라스석에 앉아 바라보는 광장 풍경은 어떤 시름도 잊게 할 만큼 평화롭고 아름답다.

 

중앙시장광장에 이은 다음 목적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벨 성(Zamek Królewski na Wawelu)으로 정했다. 광장에서 그로츠카 거리(Ulica Grodzka)를 거쳐 비스와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바벨 성까지, 왕과 귀족이 다니던 로열 루트를 따라 걷는다.

 

붉은 지붕이 인상적인 바벨 성의 역사는 9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폴란드의 수도가 크라쿠프였던 11~17세기에 폴란드 왕이 살았던 성으로 웅장함보다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과 견고함이 느껴진다.

 

현재는 성 전체가 박물관으로, 특히 바벨 대성당이 볼 만하다. 이곳은 왕의 대관식과 장례식이 열린 장소이자 비이탈리아인으로는 첫 교황이 된 폴란드 태생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미사를 올린 성당으로도 유명하다.

 

사실 성 자체보다 주변 나무숲과 어우러진 한가로운 풍경이 마음에 더 와닿는다. 성벽 아래 경사진 잔디밭은 현지인이 사랑하는 피크닉 장소다. 주홍빛으로 물든 강물 위를 미끄러지듯 유람선이 흘러가는 해 질 녘 풍경은 가을날의 운치를 더한다.

 

어스름이 깔릴 때쯤 강 반대편으로 넘어가 도시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대관람차, 크라쿠프 아이에 몸을 실어본다. 빛나는 조명으로 한층 웅장해진 바벨 성과 소란을 벗고 고요히 침잠하는 중세 도시의 밤 풍경은 더없이 성스럽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으로 등장한 '카지미에시'이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으로 등장한 카지미에시.

'크라쿠프'의 '유대인 지구'는 오늘날 개성 넘치는 그라피티와 예술적 감흥으로 가득한 인기 있는 명소이다.

크라쿠프의 유대인 지구는 오늘날 개성 넘치는 그라피티와 예술적 감흥으로 가득한 인기 있는 명소다.

나치 치하의 엄혹했던 실상을 알 수 있는 '오스카 쉰들러 팩토리'이다.

나치 치하의 엄혹했던 실상을 알 수 있는 오스카 쉰들러 팩토리.

근현대 역사의 아픔 속으로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을 가장 격렬하고 처참하게 겪은 나라다. 수도 바르샤바를 비롯한 여타 도시들이 파괴된 것과 달리 크라쿠프는 비교적 온전하게 살아남은 유일한 도시다. 독일 나치군의 전략적 본거지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크라쿠프에는 역사적 비극의 잔재가 곳곳에 상흔처럼 남았다.

 

바벨 성 남쪽에 있는 카지미에시(Kazimierz)는 오랜 세월 유대인이 모여 살던 곳이다. 전쟁을 겪으며 터전은 황폐해졌지만, 스티븐 스필버그가 1993년 제작한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유대인 지구는 활기를 되찾았다.

 

오늘날에는 수많은 회당과 개성 넘치는 카페가 이웃하는, 역사와 예술적 감흥으로 가득한 문화지구로 성장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독일 사업가이자 나치당원인 오스카 쉰들러가 생사의 갈림길에 처한 유대인 1,100명을 자신의 공장에 취업시켜 목숨을 구해준 실제 사건을 다룬다.

 

크라쿠프에는 그가 운영한 금속공장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오스카 쉰들러 팩토리(Fabryka Emalia Oskara Schindlera)가 있다. 나치 치하의 초창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엄혹하던 당시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전시한다. 크라쿠프 여행에서 반드시 들러야 할 장소 가운데 하나다.

유대인의 참혹했던 실상을 가감 없이 만날 수 있는 곳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다. 크라쿠프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근교 도시 오시비엥침(Oświęcim)에 자리한다. 정식 명칭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국립박물관’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인근의 비르케나우 수용소를 아우른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이 끔찍하게 죽어간 현장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잔혹함과 무력함, 절망과 공포가 혼재된 슬픔이 차오른다. 한편으로는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닫는다.

 

역사적 사실을 좀 더 체계적이고 자세하게 알고 싶다면, 한국어 가이드 투어를 예약하고 방문하자. 투어는 3시간 30분 정도 진행되며, 박물관 입장 시 신분증 검사에 필요하니 여권을 지참한다.

클래식 선율처럼 잔잔한 뷰가 마음을 끄는 '크라쿠스 마운드'이다.

클래식 선율처럼 잔잔한 뷰가 마음을 끄는 크라쿠스 마운드(Krakus Mound).

'크라쿠프의 쇼팽' 갤러리에 있는 조각상이다.

폴란드인의 문화적 자부심으로 통하는 프레데리크 쇼팽. 크라쿠프의 쇼팽 갤러리에서는 쇼팽의 가장 유명한 피아노 작품을 365일 감상할 수 있다.

쇼팽의 ‘녹턴’ 선율이 흐르고

지동설을 제창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 노벨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과학자 마리 퀴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 폴란드에는 인류사에 이름을 남긴 걸출한 인물이 많다. 그중 폴란드인의 문화적 자부심으로 통하는 이가 프레데리크 쇼팽이다.

 

낭만 음악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그는 피아노 연주곡의 한 장르인 ‘녹턴(Nocturne)’을 풍성하게 꽃피웠다. 프랑스어로 밤을 뜻하는 녹턴은 밤의 상념을 담은 음악, 야상곡(夜想曲)이라고도 한다. 쇼팽은 느리게 흘러가는 선율 속에 슬픔을 새겨 넣은 녹턴 21곡을 남겼다.

39세의 이른 나이에 요절한 폴란드의 천재 작곡가 쇼팽은 비록 파리에서 음악적 꽃을 피웠으나 그의 영혼은 평생 조국 폴란드를 그리워했다. 그래서 그의 고향 바르샤바에는 공항 이름조차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일 정도로 쇼팽의 흔적이 차고 넘친다.

 

그의 심장이 묻힌 성십자가 성당, 그의 삶과 음악을 모아둔 쇼팽 박물관, 매주 일요일마다 쇼팽의 피아노곡이 연주되는 와지엔키 공원 등. 한국인 최초로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우승하며 한층 친숙하게 느껴지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5년에 한 번씩 바르샤바에서 개최되며 그를 추모한다.

폴란드인의 쇼팽 사랑이 워낙 크다 보니 폴란드 어느 도시에서나 그의 연주곡을 들을 수 있는데, 크라쿠프에서는 쇼팽의 명곡을 특별하게 감상할 수 있다. 크라쿠프 구시가의 중심부 15세기 건축물 안에 자리한 쇼팽 갤러리(Chopin Gallery)에서 쇼팽 연주회가 열린다.

 

고풍스러운 건물 내부를 따라 자그마한 방에 들어서면, 그랜드피아노 한 대와 의자 80석이 전부인 콘서트홀이 모습을 드러낸다. 규모는 소박하지만, 감동의 무게만큼은 거대한 콘서트홀에서 감상하는 것 못지않다.

 

이곳에서는 일 년 내내 매일 오후 7시 30분부터 1시간 동안 쇼팽의 가장 유명한 피아노 작품이 연주된다. 작은 공간에서 이뤄지는 짧은 연주지만, 연주자의 손놀림도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피아노 선율과 와인 한 잔이 어우러지는 밤은 꽤 낭만적이다.

수도 바르샤바가 폴란드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면, 크라쿠프는 폴란드가 겪어온 과거를 품고 있다. 찬란하게 빛나던 영광의 순간과 가눌 길 없는 고통으로 몸부림친 지난날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오늘날의 크라쿠프를 완성했으리라. 특별할 것 없이 잔잔한 사람들의 일상이, 그 평온함이 참 다행이라 여겨진다.

이 콘텐츠의 원문은 GOLD&WISE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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