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이자 지휘자, 피아니스트, 음악 감독, 음악 교육자 등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레너드 번스타인은 미국 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음악적 재능을 펼친 번스타인은 미국 예술 문화의 상징과 같다. 시대를 넘어 여전히 사랑받는 음악가, 레너드 번스타인의 생애를 따라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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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이자 지휘자, 피아니스트, 음악 감독, 음악 교육자 등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레너드 번스타인은 미국 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음악적 재능을 펼친 번스타인은 미국 예술 문화의 상징과 같다. 시대를 넘어 여전히 사랑받는 음악가, 레너드 번스타인의 생애를 따라가본다.
음악에 대한 열정 그리고 배움
1918년 미국 보스턴 인근 로렌스라는 마을에서 우크라이나계 유대인 부부의 아들로 태어난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그의 음악 인생은 어린 시절 고모에게 피아노를 선물받으면서 시작됐다. 피아노의 매력에 푹 빠진 번스타인은 레슨을 받게 해달라며 졸랐지만, 이내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힌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이 이루지 못한 랍비의 꿈을 대신 이뤄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스타인은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갔고, 10대 시절부터 피아노 레슨과 이론 공부를 통해 음악가로서의 기본을 다졌다.
1935년, 번스타인은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전공은 문학과 철학이었지만, 음악에 관심이 더 컸던 그는 음악 이론가 월터 피스턴에게 수학하는 한편, 대학 합창단 반주자로 활동하고 연극제 무대음악을 작곡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졸업 이후 번스타인이 향한 곳은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이다. 당대 최고의 지휘자였던 프리츠 라이너(Fritz Reiner)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다.
1924년 전문 음악가 양성을 목표로 설립된 커티스 음악원은 주요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단의 수많은 단원을 배출하며 오늘날까지 높은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이곳에서 번스타인은 지휘와 작곡법, 피아노 등을 배우며 음악적 역량을 키웠고,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Sergey Koussevitzky)와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Dimitri Mitropoulos), 작곡가이자 음악 평론가 에런 코플런드(Aaron Copland) 등 음악계 대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깊은 음악적 영감을 받았다.
천재 지휘자의 탄생
1943년, 번스타인이 뉴욕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임명되면서 그의 운명을 바꿀 결정적 사건이 벌어진다. 카네기홀에서 열릴 저녁 공연을 앞두고 뉴욕 필하모닉 객원 지휘자 브루노 발터가 갑작스럽게 쓰러진 것이다.
병상에 누운 그를 대신해 지휘봉을 잡은 건 다름 아닌 부지휘자 번스타인. 리허설도 못한 채 모두의 우려 속에 무대에 올랐지만 그는 기적처럼 멋진 공연을 펼쳤고, 이 장면은 전국으로 생중계되었다. 공연 다음 날, <뉴욕타임스> 1면을 장식한 번스타인은 하룻밤 새 유명인이 됐다. 지휘자로 화려하게 데뷔한 그의 나이는 고작 스물다섯이었다.
번스타인이 주목받은 건 미국 출신의 지휘자라는 영향이 컸다. 당시 주요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대부분 유럽 출신이었기에 미국에서 나고 자란 번스타인의 등장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1958년, 번스타인은 미국인 최초로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 취임하며, 명실공히 뉴욕 필하모닉의 황금시대를 연다.
번스타인의 독특한 지휘 스타일도 화제였다. 그는 온몸을 사용해 음악을 표현하고, 넘치는 에너지와 카리스마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무엇보다 번스타인은 청중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지휘자였다. 단순히 악보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청중에게 이야기와 감정을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음악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클래식과 대중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자 한 그의 관심은 음악 교육으로 이어졌다. 1958년 시작된 ‘CBS 청소년 음악회’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번스타인이 직접 대본을 쓰고 출연한 이 프로그램은 에미상을 세 차례나 수상했고, 음악과 철학, 사회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유머를 갖춘 그는 어린아이를 비롯해 대중을 사로잡으며 매주 수만 명을 TV 앞에 끌어들였다. 1972년까지 53회에 걸쳐 방영된 이 프로그램은 음악 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미국 클래식 청취 인구 증가에 크게 기여했다.
20세기 만능 엔터테이너
“나는 지휘도 하고 싶고, 피아노도 치고 싶다. 교향곡도 쓰고 싶고,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를 위한 음악도 만들고 싶다. 책도 쓰고 싶고, 시도 쓰고 싶다. 내게는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20세기 미국 최고의 만능 엔터테이너로 꼽히는 번스타인은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특히 작곡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클래식과 오페라, 뮤지컬, 영화음악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폭넓은 창작 활동을 펼쳤다. 1944년 한 해에만 교향곡 1번 ‘예레미야’와 발레 ‘팬시 프리’, 브로드웨이 뮤지컬 <온 더 타운>이 동시에 초연될 만큼 그의 창작에 대한 열의는 왕성했다.
번스타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1957)는 뮤지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셰익스피어의 고전 <로미오와 줄리엣>을 새롭게 각색한 이 작품 배경은 1950년대 뉴욕으로,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던 이민자의 암울한 현실과 갈등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화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시대상을 반영한 스토리와 수준 높은 음악과 가사, 안무의 조화를 통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수준을 단숨에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외에 토니상 최우수 뮤지컬상을 수상한 <원더풀 타운>(1953), 토니상 4개 부문 수상에 빛나는 <캉디드>(1956) 등 번스타인의 뮤지컬은 브로드웨이에 활기를 불어넣고, 클래식과 현대음악을 넘나드는 독특한 음악으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58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가 된 이후, 번스타인은 그 어떤 지휘자보다 활발하게 활동했다. 1969년 마지막 공연까지 무려 939번이나 지휘대에 섰고, 500개가 넘는 음반을 리코딩했으며, 틈틈이 창작 활동에 전념하고 저서 집필과 음악 강의에도 적극적이었다.
“하루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 연습하지 않으면 아내가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는 그의 말처럼 어떤 순간에도 음악을 놓지 않은 번스타인의 열정은 수많은 작품과 음반으로 남아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영원히 기억되는 음악
1989년 12월 23일, 베를린장벽 붕괴 기념으로 열린 음악회에서 번스타인은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지휘했다. 유럽 각국의 오케스트라 단원이 한데 모인 기념비적 공연에서 번스타인은 다시 한번 주목받는다. 마지막 4악장에서 ‘환희의 송가’를 ‘자유의 송가’로 바꾸어 연주했기 때문이다.
번스타인은 예술을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한 예술가였다. 진보 성향의 정치 활동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상당 기간 미국 정보기관의 감찰 대상이기도 했지만, 그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평화와 자유를 지지하고 인권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 같은 사회 이슈에도 서슴없이 목소리를 냈다. 핵무기를 만드는 레이건 행정부를 비판하는가 하면, 에이즈 문제를 다룬 전시회의 정부 지원금 취소 방침에 항의하며 부시 행정부의 국가 예술 훈장 수여 제의를 거부한 일화도 유명하다.
1990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레너드 번스타인의 인생은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다. “음악은 이름 지을 수 없는 것들을 이름 짓고, 알 수 없는 것들을 전달한다.”
미국 역사상 가장 재능 있고 성공한 음악가이자 대중이 클래식을 쉽게 접하도록 한 친절한 선생님이었으며,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미국 예술 문화의 아이콘이었던 번스타인의 삶과 음악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이 콘텐츠의 원문은 GOLD&WISE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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