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마법사와 에펠탑

2025.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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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본 구도이다.

1889년 5월 6일,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 이전에는 볼 수 없던 독특한 형태의 구조물이 세상에 공개됐다. 높이 330m, 무게 7,300톤에 달하는 이 거대한 철탑은 건축가이자 토목공학자 알렉상드르 귀스타브 에펠(Alexandre Gustave Eiffel)의 작품. 훗날 파리의 상징이자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건축물로 자리 잡은, 파리의 에펠탑이다.

건축가이자 토목공학자인 '알렉상드르 귀스타브 에펠'의 사진이다.

'프랑스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세계박람회'의 모습이다. 가운데 에펠탑이 완공되었다.

'에펠탑'이 완공되는 과정을 단계별로 보여주는 이미지다.

모험하는 건축가, 에펠

1886년 5월, 프랑스 정부는 박람회에 선보일 구조물 설계 공모전을 열었다. 주제는 높이 300m 타워 모양의 건축물로 파리만의 시그너처 구조물을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사실 프랑스는 지금까지 꾸준히 박람회를 개최해왔지만 기대만큼 큰 수익을 내지 못했고, 1878년 행사에선 엄청난 적자를 기록했다.

 

게다가 영국 런던의 ‘대박람회’가 크게 성공하자 이에 자극받은 프랑스 정부는 1889년 프랑스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세계박람회를 기획했다. 런던을 능가하는 초대형 박람회를 개최해 많은 관람객을 유치하려면 관심을 끌 대표적 상징물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고 자꾸만 보고 싶은 건축물 제작 소식에 수많은 지원서가 몰렸다. 그중 만장일치로 선정된 게 에펠탑이다.

하지만 첫 삽을 뜨기도 전에 문제가 발생했다. 에펠탑을 지으려면 800만 프랑이 필요했지만 정부가 지원할 수 있는 건 150만 프랑뿐이었던 것. 에펠은 자신이 부족한 공사비를 부담하는 대신 20년간 에펠탑의 독점 운영권을 갖는 조건으로 공사에 착수한다.

 

만약 탑을 만드는 데 실패하거나 흥행하지 못한다면 모든 빚을 에펠이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그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공사를 진행한 건, 분명 에펠탑 건설이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에펠의 결단력과 도전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파리의 상징이자 세계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에펠탑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파리 만국박람회'에를 그려낸 그림이다.

혹평과 호평 사이

공모전에서 에펠탑이 선정됐다는 소식은 파리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석조 건물이 대부분이던 파리에 철근 구조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에펠탑은 상당히 이질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초기의 에펠탑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노란색이었다. 고풍스러운 파리 분위기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프랑스의 정치가와 유명 학자, 비평가 등 많은 지식인이 격렬히 반대했다. 모파상을 비롯한 문학인도 마찬가지. 소설가 레옹 블루아는 “진실로 비극적인 가로등”이라 혹평했고, 시인 프랑수아 코페는 “일그러진 체육관 장비 같은 철기둥”이라고 조롱했다.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는 ‘300인 위원회’를 조직해 에펠탑 건축을 반대하는 탄원서를 정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1889년 3월 31일, 에펠탑의 완성을 알리는 준공식이 개최됐다. 온갖 비난과 비판에도 에펠은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관철해 에펠탑을 완성한 것이다. 2년 2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낸 에펠탑은 높이 330m(안테나 포함)로, 1930년 뉴욕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될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는 대성공이었다. 무려 200만 명에 가까운 방문객이 파리를 찾았고, 에펠탑을 보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박람회에서 에펠이 거둔 수익은 1,000만 프랑으로 그가 투입한 공사비의 3배에 이른다. 반드시 성공할 거란 그의 확신이 현실이 된 순간, 비난 일색이던 사람들과 여론의 반응도 달라졌다.

 

조르주 쇠라, 로베르 들로네, 마르크 샤갈, 앙리 루소 등 훗날 에펠탑에 매료돼 작품으로 남긴 예술가도 많다. 이로써 에펠탑은 거대한 쇳덩이라는 오명을 벗고 파리를 대표하는 상징이자 프랑스의 자랑으로 자리매김했다.

'에펠탑'을 밑에서 위로 올려다본 구도이다.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으로 프랑스가 헌정한 '자유의 여신상'이다.

철의 마법사, 에펠

“나는 에펠탑을 질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보다 그 탑이 더 유명하다. 사람들은 그 탑이 내 유일한 작품인 줄 안다.” 그가 에펠탑으로 유명해진 건 맞지만, 사실 에펠은 이전부터 건축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일찍이 고강도 철근을 다리나 건물에 적용했는데, 포르투갈 도루 강가의 대철교(1876년), 프랑스 남부 가라비 고가교(1884년), 헝가리의 페스트 기차역, 니스 천문대의 돔 등이 대표적이다.

 

에펠의 등장으로 프랑스 철교 건설 능력이 영국을 앞질렀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가 헌정한 ‘자유의 여신상’ 내부 철골 구조도 에펠의 작품이다. 철의 마법사란 수식어는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었다.

에펠은 조립식 건축 공법의 선구자로도 통한다. 설계를 바탕으로 건축 재료를 공장에서 생산한 뒤,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이다. 에펠탑에는 조립식 철재 8만 개가 사용됐는데,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철제 조립물을 연결하며 쌓아 올렸다. 단순해 보이지만 탑의 골조만 1,700장이 넘는 도면을 그릴 정도로 치밀한 계산과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에펠탑이 엄청난 높이와 무게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은 건 트러스 구조를 적용했기 때문이다. 에펠탑을 자세히 보면 삼각형 패턴이 반복되는 걸 알 수 있는데, 이 삼각형을 그물 형태처럼 연결한 트러스 구조가 힘을 분산시켜 무게 1만 톤을 견딜 수 있게 한 것이다.

 

아주 작은 오차라도 있었으면 오늘날의 에펠탑은 볼 수 없었을 터. 그만큼 에펠탑 설계의 정확도와 견고함은 놀라움 그 자체다. 에펠탑은 단순히 보여주기식 구조물이 아니라 그동안 에펠이 쌓아온 경험과 터득한 노하우, 당대 최고의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총망라한 집약체다.

1889년 9월, 에펠탑에 오른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은 이런 글을 남겼다. “현대건축의 모범이 될 엄청난 구조물을 만든 에펠 경에게 모든 훌륭한 공학도를 대신해 가장 위대한 존경과 찬사를 보냅니다.”

이 콘텐츠의 원문은 GOLD&WISE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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