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관람 포인트

2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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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인 '에곤 실레'의 '원탁' 그림이다.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상징은 찬란한 금빛이다. 그의 대표작 ‘키스’와 ‘유디트’의 반짝임 덕에 클림트는 ‘황금의 화가’라고도 한다. 이런 그가 ‘혁신의 예술가’라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클림트는 19세기 말에 일어난 진취적 예술 운동의 구심점이었고, 보수 기득권에 맞선 자유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클림트의 이면부터 1900년대의 진취적인 비엔나 예술을 조명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다. 세계 각국 예술계에 변화와 혁신의 마중물이 된 1900년대 비엔나 예술을 이번 전시를 통해 생생히 만날 수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수풀 속 여인' 그림이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수풀 속 여인’은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인상주의 영향이 뚜렷히 드러난 대표작이다.

모리츠 네어의 '고양이를 안은 클림트' 사진이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외국의 선진 예술을 경험하며 기존 화풍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을 도입하고자 했다.

전통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대로

클림트의 혁신성은 보수적인 예술계에서 비롯했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비엔나를 유럽 예술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 당시 최고 예술가와 건축가가 비엔나에 모여들었고, 수많은 건축물과 미술관, 공연장이 세워졌다. 하지만 클림트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에게 그 결과물은 실망을 안겼다.

 

건물과 조각, 그림 등은 새것이었지만 과거를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이다. 혈기왕성한 예술가들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이에 클림트를 중심으로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예술가들이 1897년 ‘비엔나 분리파’를 결성했다. 보수적이고 진부한 예술계에 ‘자유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선구적 예술가의 진취적 활동

비엔나 분리파를 상징하는 단어 중 하나로 ‘총체 예술’을 꼽는다. 회화뿐 아니라 조각, 음악, 디자인 등 여러 예술 장르를 모아 총체적 아름다움을 구현한다는 뜻이다. 대표적 예로 ‘베토벤에 대한 경의’를 주제로 1902년 열린 제14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를 들 수 있다. 베토벤의 음악과 함께 그에게서 영감을 받아 완성한 작품을 한데 선보인 전시다.

 

전시실 한가운데는 베토벤 조각상이 놓였고, 클림트가 그린 그림을 비롯한 다채로운 작품이 배치되었다. 개막식에는 구스타프 말러의 지휘 아래 ‘베토벤 교향곡 9번’ 일부가 울려 퍼졌다. 전례 없는 전시에 예술계는 깜짝 놀랐다. 새롭다는 평가를 받은 한편 급진적 시도를 불편해하는 시선도 있었다.

비엔나 분리파는 잡지도 출간했다. 1898년부터 1903년까지 발행한 <베르 사크룸(Ver Sacrum, 성스러운 봄)>이다. 이 잡지는 외국 예술 동향을 알리고 예술계의 기존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비엔나 분리파 예술가들이 돌아가면서 디자인을 담당했기에 매호 디자인이 달랐다. 이 역시 문학과 그림, 표지 디자인을 결합한 ‘총체 예술’의 결과물이다.

'담배를 피우는 콜로만 모저' 초상화이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을 설립한 콜로만 모저의 초상화.

유리로 된 '페노멘 그레 장식'이다.

기하학적이고 간결한 형태와 강렬한 색채 대비로 새롭고 대담한 시도를 보여주는 꽃병. 콜로만 모저 디자인, 요한 뢰츠 비트베 제작.

일상을 예술로 승화한 비엔나 디자인 공방

“공예도 예술과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하며, 일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예술은 없다.”

비엔나 분리파의 철학은 분명했다. 일상적 분야로 예술의 지평을 넓히고자 했고, 모방이 아닌 독창성을 추구했다. 이 같은 철학을 가장 잘 보여준 곳이 비엔나 디자인 공방이다. 비엔나 분리파의 창립 멤버 콜로만 모저와 요제프 호프만이 1903년 설립한 예술 공방으로, 가구와 벽지, 도자, 직물, 그래픽디자인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뛰어난 활동을 펼쳤다.

 

특히 요제프 호프만은 일상 속 물건에 예술적 가치를 담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가 진행한 통합 예술 프로젝트를 눈여겨볼 만하다. 공간의 모든 요소에 동일한 디자인 패턴을 적용해 통일감을 부여하고 미적 완성도를 높이려는 프로젝트다. 호프만은 창문, 문, 가구, 식기 세트 등 집 안 요소를 ‘한 세트’로 보이도록 디자인하며 최상의 효과를 내고자 했다. 비엔나 분리파의 ‘총체 예술’ 개념을 직접 실천한 것이다.

신예술가 그룹의 대표 작가 '리하르트 게르스틀'의 초상 사진이다.

신예술가 그룹의 대표 작가 리하르트 게르스틀 초상 사진.

오스카르 코코슈카가 그린 '헤르만 슈바르트발츠'의 초상화이다.

독특한 기법으로 인물의 내면을 표현한 신예술가 그룹 작가 오스카르 코코슈카가 그린 초상화. 예술가를 적극 후원한 헤르만 슈바르츠발트의 모습을, 얼굴과 손을 강조해 그렸다.

1900년대 비엔나를 상징하는 또 다른 이름, 표현주의

비엔나 분리파는 후배 예술가들의 새로운 시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했다. 에곤 실레를 비롯해 리하르트 게르스틀, 오스카르 코코슈카 등이 비엔나 분리파에 이어 혁신적으로 예술계를 이끌었다.

에곤 실레는 1908년 클림트를 만난 뒤 인생이 뒤바뀌었다. 클림트는 실레를 주변에 소개하고 후원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 당시 실레는 아카데미 교육을 받았지만, 틀에 박힌 교육에 신물이 난 상태였다.

 

클림트를 만난 뒤 실레는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독자적 예술을 추구하는 ‘신예술가 그룹’을 결성했다. 신예술가 그룹의 젊은 화가들은 개인 감정을 색채와 형태로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하며, 자유롭게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개척했다.

신예술가 그룹의 대표 작가로 리하르트 게르스틀과 오스카르 코코슈카를 주목할 만하다. 게르스틀은 실레와 같은 ‘아카데미의 반항아’였다. 전통 화법을 거의 구사하지 않았고, 거칠고 자유로운 붓놀림과 과감한 색채로 인물을 표현했다.

 

독자적으로 활동하며 시대를 앞선 예술 양식을 선보인 게르스틀은 현대 무조(無調) 음악의 창시자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깊이 교류했다. 전통 형식에서 벗어나려고 한 쇤베르크와 어울리며 예술적 실험과 도전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게르스틀의 실험적 작품은 당대 예술가에게 철저히 외면받았지만, 오늘날 그는 독창적 화법으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인정받는다.

코코슈카 역시 ‘야수 중의 야수’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거칠고 과감한 작품을 선보였다. 폭발하는 듯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불안정한 인간 심리를 묘사했다. 비록 연극과 문학 등 장르를 넘나드는 독창적 실험으로 혹평도 받았지만, 오늘날 그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를 이끈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에곤 실레의 대표작인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이다.

예민한 성격과 내면의 불안한 감정이 오롯이 담긴 에곤 실레의 대표작,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깍지를 낀 에곤 실레' 사진이다.

‘자아 정체성의 위기’를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표현한 에곤 실레의 초상 사진.

내면을 담은 작품, 에곤 실레

신예술가 그룹을 이끈 에곤 실레는 1900년대 비엔나 표현주의의 독보적 선구자다. 짧은 예술 인생에서 인간 감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모더니즘 예술의 선구자가 되었다. 실레는 자아 정체성과 고독, 욕망 등 심리적·실존적 주제에 심취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 혼자라는 두려움, 고독감, 불안감 등 내면의 갈등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15세에 아버지를 여읜 실레는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 되었다. 보살핌을 받을 나이였지만, 어머니는 그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불안정한 가족관계는 훗날 작품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00여 점에 이른 자화상을 그리며 죽음에 대한 불안을 직시했고 예술가라는 정체성을 탐구했으며, 풍경화에도 속마음을 투사해 고립된 마음을 드러냈다.

 

실레에게 그림은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거울이었다. 실레가 남긴 드로잉은 4,000장에 달한다. 그중 대다수는 누드화로, 그 작품 속 인물은 대부분 깡말랐고 인체가 비정상적으로 왜곡되었으며 표정에 박탈감과 고통, 절박감이 드러난다. 단, 실레의 작품을 연도별로 훑다 보면, 그가 결혼 후 안정을 찾았음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경력 초기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는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길 원했다. 모델인 발리 노이칠과 오래 연애했지만, 결혼은 중산층 집안의 딸 이데트 하름스와 했다. 이후 그의 작품에는 풍만하고 여유로운 인물이 주로 등장한다. 결혼 후 찾은 마음의 안정이 작품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요제프 호프만이 디자인하고 비엔나 디자인 공방이 제작한 ‘꽃 장식 테이블 M436번’이다.

요제프 호프만이 디자인하고 비엔나 디자인 공방이 제작한 ‘꽃 장식 테이블 M436번’. 호프만은 스승인 기능주의 예술가 오토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을 발전시켰다.

1900년대 비엔나 예술의 유산

1900년대 비엔나 분리파와 비엔나 디자인 공방은 예술계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클림트와 비엔나 분리파는 오스트리아 예술에 ‘도전과 실험’이라는 나무를 심었다. 이 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실레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에게 ‘자유’라는 열매를 선사했다. 비엔나 분리파의 ‘총체 예술’ 개념은 훗날 기능주의 예술 학교 바우하우스 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요제프 호프만과 콜로만 모저는 비엔나 예술을 모더니즘으로 이끈 장본인이다. 호프만은 자신의 스승이자 비엔나 건축계의 대부 오토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기능주의적 미학’을 추구했다. ‘정사각 호프만’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정사각형을 활용한 실용적 조형물을 많이 만들었고, 간결한 디자인에 심취했다.

 

모저는 예술의 상업성을 중시했고, 공예의 예술성을 강조하며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무는 데 일조했다. 곡선과 자연물에서 기하학 패턴으로, 다시 빛과 색으로 넓혀간 작업은 비엔나 예술계가 모더니즘으로 나아가는 토대가 됐다.

비엔나 분리파의 활동은 불과 20여 년 만에 막을 내렸다. 클림트가 생을 마감하고 모저도 세상을 떠난 뒤, 젊은 실레도 이들을 따라갔다. 주축을 잃은 비엔나 분리파는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오스트리아는 제국의 명성을 잃었고, 예술계도 침체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비엔나 분리파가 남긴 유산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다. 1900년대 이루어진 격정적 도전과 실험 정신은 지금도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이 콘텐츠의 원문은 GOLD&WISE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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