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까지만 해도 보티첼리는 비판적 시선을 받았다. 르네상스를 이끈 대작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이 주목받을 때, 보티첼리 작품은 원시적이고 중세적이며 미숙하다고 평가받았다.
바티칸의 부름을 받을 만큼 소위 ‘잘나가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1490년대부터 과거로 회귀한 듯 중세 시대 고딕미술 화풍을 좇았다. 1500년 이후로는 작품도 거의 남기지 않아 서서히 잊혔다.
화가이자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는 『미술가 열전』에서 보티첼리의 말년에 대해 “일도 못하고 똑바로 설 수도 없어 목발을 짚고 다니다가, 병들고 노쇠해져 세상을 떠났다”라고 표현했다. 그가 쓴 기록에는 오류도 있지만, 보티첼리에 대해 그만큼 자세히 기록한 평론가가 없기에 중요한 참고서로 여겨진다.
보티첼리가 재조명받은 건 1860년대 들어서다.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보티첼리 작품이 공개되고, 유럽 전역의 미술관에서 관심을 보이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영국에서 그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1875년 크리스티 런던 경매에 ‘비너스와 마르스’가 오르자, 당시 영국 총리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관심을 내비쳤을 정도다. 그 영향으로 ‘비너스와 마르스’는 영국 공공미술관인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낙찰받았다.
1870년대 영국 예술 평론가 존 러스킨의 공도 있다. 그는 “몸에 밴 세련된 매너, 학문적 깊이에 바탕을 둔 조리 있는 말투가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이었다. 그리고 보티첼리는 그런 시대정신에 깊이 영향받은 인물이었다”라며 보티첼리를 집중 탐구했다.
그는 심지어 보티첼리를 비운의 사랑꾼으로도 묘사했다. ‘비너스의 탄생’과 ‘비너스와 마르스’, ‘어느 부인의 초상’ 등에 모델로 등장한 시모네타 베스푸치를 보티첼리가 짝사랑했다는 것. 시모네타는 보티첼리를 적극 후원한 베스푸치가의 며느리였다. 아름다운 외모와 따뜻한 인품을 지녔고, 보티첼리의 실력을 높이 샀으며 우호적이었다.
여기에 스물두 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한 스토리가 더해져 시모네타는 ‘불운한 예술가’에게 사랑받은 인물로 기억되었다. 보티첼리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감히 범접할 수 없어, 그녀를 주인공으로 그리며 마음을 달랬다고 전해진다.
보티첼리 작품은 가치와 진위를 두고 논란이 많았다. 직접 기록하지 않아 어떤 작품을 어떻게 그렸는지, 모델이 누구였고 왜 그렸는지 전해지는 바가 없어서다. 미술상과 명문가의 작품 의뢰서로 확인하거나, 일관된 구도와 작화 방식으로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오늘날까지 진위 논쟁이 분분한 작품도 있다.
1465년경 작품으로 추정되는 ‘동방박사의 경배’, 1467년 작 ‘외랑(外廊)의 성모’, 1470년경 완성한 ‘젊은 남자의 초상’, 14751480년 완성한 ‘붉은 모자를 쓴 젊은 남자의 초상’ 등 초창기 작품은 최근까지도 보티첼리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었다. 보티첼리를 추종한 1516세기 작가가 많은 만큼 모작이 여러 점 전해지는 것도 진품 논란을 일으킨 원인이다.
일례로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비너스와 마르스’를 낙찰받을 당시 함께 구입한 ‘알레고리’가 있다. 당시에는 그의 작품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훗날 물감 분석과 적외선 촬영 등을 통해 진품이 아닌 15세기 말~16세기 초 보티첼리 추종자의 작품으로 판명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