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명의인가, 돌팔이인가?

인문학
26.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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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마음을 살펴야 진정한 공감이다

교감

머리가 아프다고 매일 병원을 찾는 할머니가 있었다. 의사들은 모두 꾀병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나이 지긋한 한 의사만은 달랐다.

그는 할머니의 말을 듣더니 청진기를 할머니의 머리에 갖다 댔다. 의사는 할머니와 말을 주고받으며 연신 고개를 끄떡였다. 할머니는 “이제 머리가 안 아프다”라며 밝은 표정으로 병원을 나섰다.

청진기는 심장 소리와 숨소리를 듣고 병을 진단하는 기구다. 청진기를 머리에 대면 무슨 소리가 들리겠는가? 돌팔이라는 핀잔을 들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의사가 청진기로 들은 것은 몸의 소리가 아니라 마음의 소리였다. 의사가 할머니의 아픈 마음에 공감을 표하자 병이 씻은 듯이 나은 것이다.

인도의 사상가 바그완 슈리 라즈니쉬(Bhagwan Shree Rajneesh, 일명 오쇼 라즈니쉬)가 쓴 <금강경 해설서>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의 뱃속에 파리 두 마리가 살고 있다는 망상에 빠진 남자가 있었다. 그는 뱃속에서 윙윙대는 파리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웠다. 여러 병원을 찾아가 보았으나 “당신의 망상일 뿐”이라는 대답만 들었다.

그는 고통이 갈수록 심해져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뱃속 파리를 꺼내주겠다는 한 의사를 만나게 되었다. 의사는 그에게 눈을 감고 침대 위에 누우라고 했다. 잠시 후 미리 잡아둔 파리 두 마리를 병에 넣고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의사는 병에 든 파리를 남자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 병을 제게 주십시오. 당장 그 바보들에게 보여주겠습니다.” 남자의 아픈 증상은 깨끗이 사라졌다. 병을 고친 의사의 비방은 놀라운 공감력이었다.

공감을 가리키는 영어 ‘Empathy’는 ‘~의 내부를 느끼는’이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상대의 입장에서 그의 내부까지 살필 수 있어야 진정한 공감이라는 것이다.

공감은 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최고의 의술이다. 돌팔이와 명의의 차이가 무엇인 줄 아는가? 돌팔이는 몸의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보통 의사는 몸의 소리만 듣고, 명의는 마음의 소리까지 듣는다.

함께 비 맞으며 ‘자연의 교향곡’을 듣다

손 위에 하트

악성 베토벤에게도 이런 공감의 달인이 있었다. 어머니였다. 천둥이 치던 어느 날, 어린 베토벤이 마당에서 혼자 비를 맞고 있었다. 소년은 나뭇잎에 스치는 비와 바람의 교향곡에 흠뻑 빠져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집 안으로 빨리 들어오라고 야단치지 않았다. 아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더니 꼭 껴안았다. 아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말했다.

“그래,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를 함께 들어보자꾸나.” 아들은 신이 났다. “엄마, 새소리가 들려요. 저 새는 어떤 새죠? 왜 울고 있어요?”

어머니는 폭우처럼 쏟아지는 아들의 질문에 다정스럽게 응대했다. 함께 비를 맞으면서 자연의 교향곡을 들었다. 훗날 영혼을 울리는 베토벤 교향곡의 싹은 아마 이때 움트지 않았을까.

비가 올 때 우산을 씌워주는 사람보다 함께 비를 맞는 사람에게 더 따스함을 느낀다. 아픈 이에게 베푸는 최고의 위안은 그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이렇게 상대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때 비로소 공감한다고 할 수 있다.

공감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지니고 있다. 크게 공감하면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베토벤의 어머니가 아들의 마음을 울리고, 그 아들이 자라 인류의 마음을 울린 것처럼. 한글 사랑에 일생을 바친 최현배 선생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선생이 감옥을 나오자 한 청년이 매일 새벽 선생의 집에 찾아가 마당을 쓸었다. 마을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청년이 말했다.

“저는 함흥 감옥에서 선생님과 한방에 있었습니다. 제가 배탈이 나서 크게 고생한 적이 있었어요. 선생님께선 굶으면 낫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혼자선 어려울 테니 같이 굶자’면서 저와 함께 밥을 굶으셨어요. 감옥에서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자 이렇게 마당을 쓸고 있습니다.”

일찍이 공자는 평생 간직할 한 가지 가르침이 있다면 무엇이냐는 제자의 질문에 “서(恕)”라고 대답했다. ‘恕(용서할 서, 어질 서)’는 ‘如(같을 여)’와 ‘心(마음 심)’이 합쳐진 글자다. 상대와 같은 마음이 될 때 상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기 때문이다.

AI 시대에 우리가 추구할 것은 지식보다는 공감!

일전에 병원에서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 과거에 떼낸 용종이 재발하지 않았는지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검사가 끝난 뒤 2호실의 문을 열고 의사와 대면했다. 의사는 탁자에 놓인 투명한 유리병을 가리키더니 내 몸에서 떼낸 용종이라고 했다. 크기가 1cm나 됨직했다.



의사의 다음 설명은 더 충격적이었다. “장이 굴절된 곳에 용종이 하나 더 있어요. 무리하게 떼어내다간 장 내벽에 상처가 생길 수 있어 없애지 못했어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의사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나에게 병원에서 준 서류를 달라고 했다. 내가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고 하자 간호사를 시켜 환자 차트를 가져오게 했다. 차트를 본 의사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 용종은 환자 것이 아닙니다.”



1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마음은 지옥과 천국을 오갔다. 병원에 입원해 개복 수술까지 해야 하는 끔찍한 상상까지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의사의 사과는 너무 짧았고, 그의 말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환자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차트만 응시할 뿐이었다.



병원에 동행한 아내가 나에게 말했다. “2호실 의사는 불친절해. 공감 능력이 없어.” 그러면서 바로 옆 1호실의 친절한 의사라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거라고 확언하는 것이었다. “아이쿠! 놀라셨죠? 죄송합니다. 제가 차트를 잘못 봤어요. 선생님의 대장은 깨끗합니다. 안심하고 돌아가셔도 됩니다.”



똑같은 ‘죄송’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지만 두 의사는 완전히 다르다. 1호실 의사는 환자의 처지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2호실 의사는 자기 입장에서 결과만 설명한다. 2호실 의사에게는 상대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공감이 부족하니까 진정성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공감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자질이다. 인간은 타자와 공감할 수 있기에 소통하고 교류하고 문화를 가꿀 수 있었다. 반면 AI는 아무리 똑똑해도 서로 공감할 수 없다. 그들이 내놓은 명석한 대답은 단지 수학적 연산에서 나온 데이터일 뿐이다.



그러므로 AI 시대에 우리가 추구할 것은 더 많은 지식이 아니라 인간 고유의 공감력을 회복하는 일이다. AI는 상대와 마음을 나눌 수도, 눈빛을 주고받을 수도 없다. 오직 인간만이 가능하다. 그런데 현대인은 스마트폰만 쳐다보느라 타인과 눈빛을 주고받지 않는다. 인간의 품성을 잃어가는 것이야말로 지금 인류에게 닥친 진짜 위기가 아닐까.

글 배연국 (소확행아카데미 원장 <내 삶이 보물이 되는 순간>, <소소하지만 단단하게>, <소확행> 저자)


출처: KB국민은행 사외보 GOLD&WISE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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